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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참혹한 중국 도굴의 역사-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도굴되지 않은 무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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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와 손전영 부대의 도굴도./이미지: 봉황망


참혹한 중국 도굴의 역사-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도굴되지
 


않은 무덤 없다


도굴꾼의 먹잇감이 된 황제들의 지하 안식처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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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의 병마용. 여러 차례 도굴 시도에도 살아남았다. /이미지=시나닷컴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돌베개)라는 책은 중국 도굴(盜掘)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2009년 발간된 이 책은 도굴을 통해 귀중한 역사와 문물이 어떻게 허망하게 사라졌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도굴의 목적은 오직 하나. 무덤 주인과 함께 묻힌 값비싼 부장품을 꺼내 팔아먹기 위한 것이다.
 
중국 국보급 문물의 절반이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지만, 이들 유물이 출토된 고분 중에 도굴꾼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도굴의 피해가 심각하다. 중국의 고분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수난을 겪었고, 동시에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문화유산이 사라졌다.
 
저자는 “문물은 모든 민족, 모든 인류가 보호하고 연구하고 함께 누려야 할 역사의 보물이다. 출토된 문물은 조상의 위한 지혜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자, 후세를 인도하는 등불이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융합하는 문명의 입체적 상징”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귀중한 유물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는 현실을 개탄했다. 중국에서는 매년 수만좌에 이르는 무덤이 파헤쳐지고, 이과정에서 유실되고 파괴된 문물은 헤아릴 수 조차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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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건릉(健陵)./ 조선DB

중국이 청나라 말기의 황제 무덤까지 도굴꾼의 먹잇감이 된 데 비해, 우리나라의 조선(朝鮮) 왕릉은 거의 도굴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시대 들어 왜(倭)가 한반도를 침략한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는다며 삼남(三南) 일대의 가야 고분을 이 잡듯이 파헤쳤는데, 이런 무분별한 발굴이 우리 고대사의 고고학적 증거를 치명적으로 훼손했다. 일제의 이런 만행이 아니었으면 가야와 삼국시대 고분도 상당 부분 보존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내려왔다. 설사 남의 조상 무덤이라고 해도 함부로 파내면 후손들이 벌을 받는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무덤은 건드리지 않는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유물 밀거래로 인한 도굴이 성행했고, 삼국시대뿐 아니라 수많은 고려 왕릉도 도굴되었다. 당시 왕릉에서 빼돌려진 고려청자는 일본으로 넘어갔다.
 
조선왕릉은 도굴의 참화를 피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무덤에 값나가는 부장품을 거의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선릉(성종)과 정릉(중종) 두 개를 파헤쳤는데 자기들이 바라던 값비싼 보물이 나오지 않자 화가 난 왜군들이 임금의 시신을 훼손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무덤은 단단한 회곽묘(灰槨墓) 구조로 되어 있어 좀처럼 도굴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수십년 간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린 북한에서도 수천년 수백년의 긴 시간을 살아남은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끊임없이 유출되고 있다. 도굴, 절도, 반출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되고 있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수백년 동안 주인의 무덤곁을 지키던 석물을 훔쳐 식당이나 정원을 꾸미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중국 도굴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한번 사라지면 되돌릴 수 없는 문화유산의 유무형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의 일부를 요약 소개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도굴되지 않은 무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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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무덤을 훔치다>(돌베개).
기록된 최초의 도굴은 2,700여 년 전 서주 말기에 일어났다. 도굴 대상은 지금으로부터 약 3,600년 전의 상(商)나라 개국 황제 상탕(商湯)의 무덤이다. 상탕의 무덤은 당시에 이미 도굴을 여러 번 당해 나온 부장품이 별로 없었다. 주나라 12대 왕 유왕(幽王) 묘는 서한(西漢: 前漢, BC202~AD8) 시대 파헤쳐진다. 전한(前漢) 시대의 잡사(雜事)를 기록한 《서경잡기》에 당시 도굴 장면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무덤은 매우 높고 컸으며, 묘문을 열어보니 온통 석회로 가득 차 있었다. 한 길 정도를 파자 운모가 나왔고, 거기서 한 자 남짓 깊은 곳에 100여 구의 시체가 있었다. 가로세로로 서로 베고 있었는데, 모두 썩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는 하나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였으며, 앉은 사람도 있고 누운 사람도 있고, 서 있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들의 옷과 얼굴은 산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 도굴 기록은 한 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초(楚)나라를 멸하는데 공을 세워 장사왕(長沙王)으로 봉해진 오예(吳芮)의 무덤이 도굴되던 상황과 흡사하다. 오예의 무덤은 서기 225년경에 도굴되었다. 도굴 당시 이미 400년 전의 무덤이었지만, 시신이 마치 어제 죽은 사람처럼 그대로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1972년 오예와 같은 시대를 산 마왕퇴(馬王堆)의 무덤이 발굴되면서 1,700년 전의 무덤 주인의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고대의 시신부패방지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오예나 유왕의 무덤 도굴 기록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도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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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종과 즉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乾陵).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시황릉과 함께 도굴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몇 안되는 릉이다. /이미지= 시나닷컴.

진나라를 지나 한나라에 이르면서 황제의 무덤은 그야말로 산처럼 높아졌고, 온갖 진귀한 부장품으로 가득 채워졌다. 한나라 황제들은 전국에서 거둬들인 세금의 3분의 1을 능묘(陵墓) 조성에 사용했다. 한무제(漢武帝)의 무릉(茂陵)은 반란군인 적미군(赤眉軍) 수만 명이 무덤을 파고 부장품을 꺼냈지만, 며칠을 파내도 절반을 채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당고종(唐高宗: 이치)과 즉천무후(則天武后)의 합장릉 인 건릉(乾陵)은 아직 도굴이나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주변에 있는 이미 도굴된 배장묘(陪葬墓: 황제 무덤 주위에 쓴 왕족이나 신하 묘) 묘의 출토 문물만 해도 4,000점에 달할 정도다.
 
중국은 왕조의 교체가 잦았고, 전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명인의 무덤이 도굴당했다. 앞서 말한 건릉은 다행히 도굴을 면한 운좋은 경우에 속하지만, 나머지 중국 역대 왕조 황제와 고관대작들의 무덤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당대(唐代) 18릉 중에서 건릉을 제외한 모든 릉이 오대(五代: 당과 송나라 사이의 시기) 후량의 절도사 온도(溫韜)에게 도굴당했다. 북송이 망한 후에 송의 황제릉들은 금이 세운 꼭두각시 황제 유예(劉豫)의 군대에 의해 도굴당했다. 조광윤의 묘도 송나라 말에 도굴되었다. 금 이후 몽골족이 일어난 혼란기에 남송의 능원도 폐허가 되었다. 청나라 말기에 와서는 명 황제 13릉과 청나라 황제의 거의 모든 능묘가 도굴당했다.
 
도굴에 미친자 '온도(溫韜)'
 
이들 유명한 도굴꾼 가운데 온도는 가히 ‘도굴에 미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대의 혼란한 틈을 타 당 고종과 무즉천이 합장된 건릉을 제외한 당십팔릉을 모두 파헤친 후 그 안의 부장품을 털어감으로써 중국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악명을 남겼다. 온도는 열살도 안 되어 마을의 유명한 도둑이 되었고, 열 댓 살의 나이에 비적단의 우두머리로 성장한다.
 
그는 차아산 소굴에 숨어 도적질을 하며 한편으로 혼란한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관망하고 있었다. 그때 온도는 지방 군벌인 이무정에게 붙어 세력을 형성한다. 당 왕조가 멸망하고, 오대의 혼란 시대가 시작되자 이를 틈타 온조는 당의 황릉을 전부 파헤치기 시작했다. <자치통감>은 그의 악행에 대해 “화원의 괴수 온도는 차아산에 무리를 모아놓고, 옹주의 각 현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7년에 걸쳐 경내에 있는 당 황제의 능묘를 모두 파헤치고 무덤 속의 금은보화를 훔쳐갔다”고 기록했다.
 
온조가 파헤친 소릉에서는 ‘앞 시대의 중요한 책들’과 ‘종요’, ‘왕희지의 필적’이 있었다고 자치통감은 기록한다. 왕희지의 필적은 서성(書聖)이라고 불린 그가 남긴 시문집 서문인 <난정집서(蘭亭集序)>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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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난 소릉6준(昭陵六骏)./ 이미지: 시나닷컴

모진 도굴의 광풍 속에서도 살아 남았던 소릉6준(당태종릉에 있던 6개의 준마상 조각)은 20세기 초 수난을 당했다. 소릉6준은 당태종 이세민이 전장에서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다 죽은 여섯 마리의 말을 조각하여 능에 안장한 것이다. 1918년 준마상 6개 중 4개가 문화재 밀수꾼들에 의해 도굴돼 미국으로 밀반출되기 직전 회수되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 준마상 2개는 이미 1914년 미국으로 밀반출된 상태였다. 나머지 4개도 마저 해외로 빼돌리려다 발각이 된 것이다. 도굴꾼에 의해 조각조각 난 소릉6준은 아직도 그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다.
 
처참히 파괴된 송나라 황제릉
 
중국 문명을 찬란하게 일으킨 송나라의 황제들 무덤도 도굴꾼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송나라 황제와 황후, 황손들의 무덤은 모두 한곳에 밀집된 형태로 조성됐고, 이후 남송, 명, 청나라도 이 밀집된 능묘 배치의 전통을 따른다. 1127년 북방 초원의 금나라 군대가 쳐 내려오자 송나라는 종이호랑이처럼 무너졌다.
 
이때 금나라는 투항한 유예(劉豫)를 대제(大齊)라는 허수아비 나라의 황제로 내세우는데 그에 의해 개봉과 낙양 일대의 능묘가 대규모로 도굴당했다. 이후 원나라가 들어오면서 능원은 폐허가 된다. 그렇다면 남송의 황릉은 어떻게 되었을까?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의 저자는 “결론부터 말하면 북송 활응의 운명은 처참했고, 남송 황릉의 운명은 더욱 처참했다”고 표현했다.남송의 황릉은 원 세조가 파견한 승려 양련진가(楊璉眞伽)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벌 때처럼 능원으로 올라가 괭이와 삽으로 영무릉(永茂陵:영종), 영목릉(永穆陵: 이종), 영소릉(永紹陵: 도종), 영종 부인 인열 황후의 지하궁을 무참히 파헤쳤다. 양련진가 일당은 묘실로 들어가 진귀한 보물을 깡그리 훔치고, 그것도 모자라 관곽을 열고 바닥에 깔아놓은 보석까지 모두 걷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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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황제릉을 표시한 옛지도. 한 곳에 모여 있어 도굴의 집중 목표물이 되었다.

이후에 기술된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도굴꾼들은 이종 황제의 관을 도끼로 쪼개고, 시신의 입을 벌려 야명주를 빼내고, 시체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뱃속의 수은을 전부 토해내게 했다. 양련진가는 이종의 머리를 자르고 두개골을 잘라 요강으로 썼다. 반면 원을 세운 몽골인 황제들은 전통에 따라 봉분을 세우지 않고, 기련곡이라는 신비의 장지에 묻혔다. 철저한 비장을 한 덕택에 몽골 황제와 귀족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중국 역사에서 도굴을 면한 유일한 황제들 무덤이라고나 할까.
 
앞선 왕조의 능원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경험한 명나라는 <대명률>에 도굴에 관한 엄격한 처벌 규정을 두었다. 그 가운데 황릉을 도굴할 경우 역모죄를 적용 능지처참과 광범위한 연좌제를 동원해서 도굴을 차단하려 애썼다. 
  
19세기~20세기 들어 중국 황실의 유물이 유럽에서 고가(高價)에 팔려나가자 도굴꾼이 들끓었다. 다음은 그 가운데 한가지 사례다.
 
<1979년 정체불명의 일당이 사천합강현에 처음으로 도굴의 선례를 남겼다. 그들은 시신의 입에서 보주를 꺼내고, 시신의 손에서 팔찌와 반지를 빼고, 시신의 머리에서 귀걸이와 금비녀를 떼어내어 문화재 전문 장물아비에게 팔아넘겼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그들을 보면서 이웃들은 무덤만 보이면 바로 삽질을 해댔다. 도굴 열풍이 순식간에 합강현을 휘감았다. 처음에는 명대 환관의 무덤을 파더니, 나중에는 아직 떼도 자리지 않은 무덤까지 팠다. 오늘 파헤쳐진 무덤이 다음날 다시 파헤쳐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누가 자기 조성의 무덤을 팔까 걱정되어 아예 미리 파놓기도 했다. 결국 합강현에는 온전한 무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어떤 곳에서는 촌장의 지휘 아래 1,000여명의 촌민이 전문적으로 도굴을 하기도 했다. 2,000좌 이상의 옛 묘가 파헤쳐져 시체가 들판에 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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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된 서태후의 무덤과 남아 있는 관곽(棺椁). /이미지: 중국 중수닷컴

청나라 황실 무덤도 도굴꾼의 손아귀를 벗아나지 못하고...
 
청나라 말기 40여 년을 섭정으로 권력을 휘두른 자희태후(서태후: 1835~1908)의 무덤도 온전하지 못했다. 태후는 죽어서 화려한 부장품과 함께 지하궁에 모셔졌다. 하지만, 중국은 곧 군벌의 시대가 되었고, 이 가운데 한 군벌의 부장이던 손전영(孫殿英)이라는 자가 장개석의 국민당 부대에 귀순해 들어갔다. 그는 군량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나라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 즐비한 동릉(황제와 황후의 능묘군)에 눈독을 들인다.
 
이때에 이르러 동릉은 이미 청황실의 보호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군벌과 지역의 도둑떼인 토비(土匪)들이 주변 나무와 전각을 뜯어가고, 지하궁에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손전영은 “어차피 우리가 손을 쓰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가져간다”며 능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능원지구 전체에 계엄령을 내려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때부터 그의 본색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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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와 손전영 부대의 도굴도./이미지: 봉황망

손전영이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서태후의 무덤이었다. 서태후 무덤에 부장된 진귀한 보물은 손전영의 손에 들어가고, 서태후의 시신은 보물 찾기하는 병사들에게 옷이 벗겨진 채 이리저리 능욕당했다. 다른 청나라 황제의 무덤도 손전영의 지시를 받은 부대에게 이런 식으로 도굴당했다. 그가 사흘 밤낮으로 도굴한 동릉의 보물은 짐수레 30대 분량이라고 한다.
 
도굴에 성공한 손전영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자, 이번에는 외곽에 숨어 있던 토비와 다른 반대 세력의 부대들이 소문을 듣고 동릉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이들이 다시 한번 지하궁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바구니와 마대자루를 들고 벌떼처럼 몰려가 깨진 그릇과 흩어진 보석 조각들을 긁어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청황실과 유신들은 비통함에 잠겼다. 마지막 황제 부의는 하얀 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매일 세 번씩 종실과 유신들을 이끌고 대상(大喪)을 당한 의식을 치뤘다. 이후에도 강희제의 경릉, 함풍제의 정릉 등 청황실의 나머지 무덤들이 차례차례 도굴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