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 박힌 저 수많은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담은 ‘시간’이다. 강제 개항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 전쟁 까지, 인천의 지나온 세월은 굴곡지고 파란만장하다. 저마다 곡절 있는 사연을 품고 자란 나무는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인천의 이 모든 시간을 묵묵히 지켜봤다. 지난한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의 가슴에는 몇 개의 옹이가 단단히 박혔다. 이 땅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은 단순한 경관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간직한 이력과 상처, 애환은 곧 우리 삶의 아픔이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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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년이 넘은 우리나라 최초의 플라터너스(사진 김성환) | |
최초의 근대식 공원에 심은 플라타너스
버즘나무는 나무의 껍질이 조각조각 벗겨지며 버짐이 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었다. 우리에게는 ‘플라타너스’가 익숙하고 낭만적이다. 6,7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이 나무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전국의 웬만한 학교에는 거목의 버즘나무가 우뚝 서 있었고 아이들은 그 그림자 밑에서 놀았기 때문이다. 방울처럼 생긴 열매는 악동의 손에 들어가면 공포의 꿀밤이 되곤 했다. 이 때문에 흔히 ‘꿀밤나무’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북한에서는 ‘방울나무’라고 부른다.
중구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앞 오솔길에는 키 큰 아름드리 버즘나무가 인천 앞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다. 나무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소재지 중구 송학동 1가 11의 1번지, 수령 131년, 높이 30.5m, 둘레 4.7m, 소유자 중구청장’이라고 적혀 있다.
나무 나이 131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천의 개항기와 맞닿는다. 이 나무는 1888년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각국(各國)공원’이 조성될 당시 제물포항을 통해 들어와 공원 조경수로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이 공원 안에 건축된 영국인 무역상 존스턴 별장 사진에 같은 종류의 플라타너스가 존재했던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슷한 시기 개항장 주변의 러시아 영사관, 세창양행 사택 등에도 이 나무가 흔하게 정원수로 심어졌다.
나무는 1백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공원의 이름은 이 땅의 운명과 함께 바뀌었다. 개항 직후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이 각국조계 안에 설계한 ‘각국(各國)공원’은 후에 ‘만국(萬國)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서(西)공원’으로 다시 이름이 변경되었다. 6·25전쟁 후엔 인천상륙작전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뜻에서 ‘자유(自由)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지난 1987년 태풍 셀마가 경인지역을 사납게 할퀴고 갔다. 그때 공원의 오래된 플라타너스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비바람에 겨우 살아남았지만 이후 공원 광장에서 볼 때 바다 경관을 가로 막는다는 이유로 대부분 잘려 나갔다. 다행히 이 플라타너스는 월미도 방향으로 살짝 비껴나 있어 날카로운 톱날을 피해 오늘도 버짐을 왕성하게 피우고 있다.
인천신사를 화장시킨 아까시 나무
이 나무처럼 애증이 교차하는 나무가 있을까.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동요 덕분에 한동안 전 국민이 이 나무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 우리가 흔히 보아왔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카시아 나무는 ‘아까시나무’가 맞다. 두 나무는 전혀 다른 종이다.
아까시는 1891년 해운회사인 일본우선회사(현 인천아트플랫폼 소재) 인천지점장으로 부임한 사까끼가 중국 상해에서 묘목을 구입해 인천공원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땅에서의 시작이다. 이와 관련해 신묘년(1891) 4월 15일 외교통상 업무를 맡았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인천 감리에게 보낸 공문이 있다. ‘상해(上海)에서 구입한 각종 꽃나무 89건을 중국 윤선(輪船)에 싣고 현재 인천항에 도착하였는데, 이 물건들은 모두 어용(御用) 물건이므로 특별히 면세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에 귀 감리(監理)는 관문의 내용대로 인천항 세무사에게 해당 꽃나무 89건은 특별히 면세하여 통관을 허가 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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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국공원이 있던 영국인 무역상 제임스 존스톤 별장과 주변의 수목들. 현재 이 자리에는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건축으로 보는 도시인천', 인천광역시 자료관) | |
동(東)공원(현 인천여상)에는 일본인들이 신성시 하던 인천신사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신사 주변을 치장하기 위해 아까시를 특히 많이 심었다. 이후 아까시는 1897년 월미도에 조림을 했다. 특히 1918년 인천부에서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면서 월미산 중턱에 회주도로를 뚫고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는데 산 곳곳에 아카시와 벚나무 등을 많이 심었다. 덕분에 월미도는 봄이면 전국에서 상춘객이 몰려들었고 철도국은 경인철도의 특별 화열차(花列車)를 운행하기도 했다. 아까시는 1907년 서울 백운동의 사방 공사에도 심어졌으나 성과를 보지 못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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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신사 모습
바람에 실려 오는 달콤하고 강한 아까시 향기는 도심의 찌든 악취를 한방에 날려 보낸다. 그 향기만큼이나 곡절도 짙다. 1년에 3m씩 자라는 엄청난 성장 속도와 땅 속 뿌리의 끈질긴 번식력 탓에 아까시 나무는 6·25 전쟁 이후 농촌 연료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했다. 80년대까지 이 땅의 황폐지를 복구하는 사방사업의 ‘모범 나무’ 대접을 받으며 식목일의 단골 나무가 되었다.
너무 과한 번식력은 화(禍)가 되었다. 개간한 산에서 농사를 못 짓게 할 만큼 주변의 나무를 죽게 하는 골칫덩어리로 전락했다. 나무 뿌리가 관을 뚫고 들어가 조상 묘지를 망치는 불경을 저지르는 ‘나쁜 나무’로 인식되기도 했다. 혹자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의 강토를 망치려고 몹쓸 나무를 심었다고 주장했다. 오랜 기간 홀대받은 아까시 나무는 1998년 IMF 외환 위기 시절 ‘숲가꾸기 공공근로사업’ 이 시행되자 산주들에 의해 제일 먼저 베어졌다. 이제 동구 밖 과수원 길에서 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포탄 세례 맞은 땅에서 움튼 느티나무
1950년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이미 월미도는 포탄 세례를 받았다. 미 해병대 항공기는 네이팜탄으로 월미도를 무차별 폭격했다. 9월 15일 상륙작전 당일 미 전함들은 하루 종일 인천을 향해 포를 쏴댔다. 새까맣게 날아온 포탄들이 월미도 전역에 쏟아졌다. 월미산은 세 번 뒤집어졌다. 쑥대밭이 된 월미산에는 한 포기 풀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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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상륙작전때 함포로 깡그리 불 타 버린 월미산 | |
‘밤낮으로 퍼부은 포격에서 과연 살아남은 나무가 있을까?’. 2015년 말 인천시서부공원사업소는 이런 단순한 의문과 호기심으로 월미공원 내에 있는 큰 나무를 모두 조사했다. 이와 함께 제17사단의 협조를 받아 금속탐지기를 동원해 포탄 파편 등을 찾기 위해 주변을 탐색했다. 8종, 89그루의 수목을 ‘발견’했다. 국립산림과학원 등 전문기관에 의뢰해 나무의 나이를 정밀 감정을 했다. 느티나무 1그루, 은행나무 2그루, 소나무 1그루 등 일곱 그루를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무로 최종 선정했다.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살아난 나무들이다. 인천상륙작전 그날의 생생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나무들은 ‘월미 평화의 나무’로 명명했다.
그중 수령 245년 된 느티나무는 상처 난 부위를 보정하고 치료하는 외과수술을 받았다. 월미도 최고령의 이 나무는 오늘도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품고 있는 격랑의 인천 앞바다를 위엄 있게 내려다보고 있다.
원고출처 : <시대의 길목 개항장>(유동현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