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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문화 유적 탐사기] 벽제관 고지(碧蹄館 古址)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4.18]



[문화 유적 탐사] 벽제관 고지(碧蹄館 古址)

서울에서 문산까지 이르는 도로 통일로, 70년대 한때 남북 사절들이 통일의 꿈을 띄우며 오가던 길. 그래서 특별히 통일로 길가 양쪽으로는 주택개량이나 농지, 농로 개선사업을 집중하여 잘사는 곳으로 보이게 하던 길.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며 길가에 코스모스 만발한 시절에 통일로를 달리는 낭만 어쩌고 하던 시절은 이미 옛날이다.

지금은 서울을 벗어나도 좌우로 계속 이어지는 시가지와 건물들, 개발공사 중인 모습 등으로 산만하기만 할 뿐이며 여유롭게 드라이브한다며 자연풍광을 찾아 통일로를 달리는 사람들은 더는 없다. 지금의 통일로는 지난 시절처럼 뻥 뚫린 하이웨이가 아니라 인구밀집지역을 통과하는 교통 지체도로이며, 그 이후 개설된 외곽순환도로나 자유로, 기타 종횡으로 지나는 도로가 잘 발달하여 이곳이 그때 그 통일로, 즉 1번 도로인지도 잘 모를 지경이다.

통일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서울외곽순환도로와 만나는 통일로 I.C를 지나고 이어서 고양 - 의정부 간을 달리는 39번 도로가 고가로 가로지르는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 삼거리 못미처가 '서울시립 승화원' 즉 옛날에 '벽제 화장터'라고 부르던 곳이며 그 삼거리를 끼고 의정부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다 보면 고가도로 옆 작은 공터에 서 있는 돌로 된 기념비 비슷한 구조물을 보게 된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차량을 타고 가다 보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지나치기 일쑤인 이 돌로 된 표지판은 무엇일까? 궁금증을 참을 길 없어서 고가도로 아래 차를 잠시 세우고 내려보았다. 사람 키보다 조금 더 큰듯한 돌 표지판은 상단 중앙에 네모난 오석(烏石)을 끼워놓고 흰 글씨로 '벽제관 고지'라고 씌어 있었다.

'벽제관 고지? 이 조그만 평지가 무슨 고지(高地)? 그럼 이 근처에서 6.25전쟁 때 무슨 치열한 전투가 있었나?'하고 들여다보니 그 아래에 한글보다 좀 더 작은 크기의 한자로 碧蹄館 古址(벽제관 고지)라고 씌어 있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잠시 더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 이곳이 그 옛날 벽제관(碧蹄館)이 있던 옛터(古址)라는 뜻이구나!'.

조선 시대 때 중국에서 오는 사신이 한양입성을 앞두고 최종으로 하룻밤 묵으며 여독을 풀고 다음 날 조정으로 들어가던 곳, 이 길은 고려, 조선 시대에도 한양과 개성, 의주 간을 오가던 중요한 도로였으며 관리들이 머무는 역(驛)이 있어 벽제역(碧蹄驛)이라 하였는데 그 벽제역에 사신을 위한 객사(客舍)가 있어 벽제관(碧蹄館)이라 하였던 것이라는 해석이 그제야 나왔다.

▲통일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서울시립 승화원(벽제 화장터)'을 지나 우측으로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변의 돌 표지판.
▲통일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서울시립 승화원(벽제 화장터)'을 지나 우측으로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변의 돌 표지판.
그럼 이곳에 벽제관(碧蹄館)이 있었단 말인가? 마치 조금 더 지나가면 기차역 벽제역(碧蹄驛)이 있어 당시 관리들이 출장길에 묵었던 벽제역(碧蹄驛)과 헷갈리게 되어 있었다. (지금의 기차역 벽제역과 당시의 벽제역은 전혀, 아무 관계가 없는 시설 명칭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떤 흔적, 하다못해 주춧돌 하나 깨어진 비석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돌 표지판 하단에 있는 설명판을 찬찬히 읽어본다.

▲돌 표지판 하단의 청동판에 설명이 씌어있다.
▲돌 표지판 하단의 청동판에 설명이 씌어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이곳에서 동북방 3. 5Km 지점에 벽제관 고지(古址)가 있다. 벽제관은 이조 제 9대 성종10년(서기 1479년)에 건립한 객관으로서 중국 사신이 들어올 때 여기에서 숙박하고 의용(儀容)을 갖추어 입경하는 것이 정례로 되어 있었으며 우리 사신이 중국에 들어갈 때에도 쉬어가던 곳이다. 그 후 일제 초기에 50여간이 헐리고 2동만 남아있었으나 6·25전란(1950년)으로 불타버리고 지금(只今)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그리고 이 부근은 임진왜란 때 피아 5만의 대군이 격돌한 고전장으로서 벽제관 북방 3Km에 위치한 혜음령에서 明의 이여송이 지휘하는 한·명 연합군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와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이끄는 일본군이 격전(1593년 1월 26일)을 벌였으며 당시 이 싸움에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高彦伯)장군이 참전하여 일본군을 무찌르고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니까 이 돌 표지석은 이곳으로부터 약 10리 북쪽에 떨어진 곳에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묵었던 객관(客館) 벽제관(碧蹄館)이 있었음을 알리기 위한 표지물이다. 그런데 이곳에 고가도로가 생기기 이전에 세워졌는지 지나가는 차량에 탑승한 채로 식별이 쉽지 않은 모습이며 (이곳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어쩌다 보았다 하더라도 차를 세워 내려볼 만한 공간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우선 눈에 띄는 큰 글씨 제목이 한글로 '벽제관 고지'라고 되어있어 무슨 6·25전쟁 전적지인가? 하고 오해하기 쉽다. 그 아래에 쓴 한자 <碧蹄館 古址>가 크기가 작아서 식별력이 떨어지고 또 古址(고지)라는 단어는 잘 쓰이지 않는 비현실적 용어이다. 차라리 큰 글씨로 '벽제관 옛터'라고 썼으면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아쉽다. 그리고 굳이 3.5Km 북방에 있는 옛터를 왜 이곳에 표시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주차 문제나 위치의 적절성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벽제관(碧蹄館) 옛터(고지: 古址)

표지판을 본 김에, 벽제관 옛터를 찾아가 보았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55-1가 벽제관 옛터였는데 그 자리에는 벽제관지(碧蹄館址)라고 씌어 있었다. 한자식 표현이 한글표현보다 때로는 의사전달이 용이하지만 이런 지명표기는 참으로 답답하다. 대부분 옛터 자리는 'OOO지(址)'라고 쓰고 있는데 'OOO 터'라고 한글로 쓰는 것이 이해는 더 쉬우니 관계자들은 참고 바란다.

아무튼, 고양동 시내 한가운데, 고양초등학교 뒤쪽 공터가 바로 벽제관 옛터였다.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헐렸고, 일부 남아있던 건물은 6. 25전쟁 때 전소하여 지금은 주춧돌만 줄지어 남아있다.

▲벽제관 자리. 유일하게 삼문이 남아있었는데 이마저도 1960년대에 허물어졌다고 한다.
▲벽제관 자리. 유일하게 삼문이 남아있었는데 이마저도 1960년대에 허물어졌다고 한다.
▲1900년대의 벽제관 모습이 오래된 사진으로 남아있다.
▲1900년대의 벽제관 모습이 오래된 사진으로 남아있다.

이곳에 육각정 정자가 있었으나 일제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과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명나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벽제관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육각정(六角亭)을 반출하여 자신의 고향인 이와쿠니시 모미지다니 공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고양시를 비롯한 관계기관들은 벽제관 지역의 유일한 현존건물인 육각정 반환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육각정에 대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육각정에 대한 설명판이 세워져 있다.

벽제관 옛터 주변은 고양군청, 고양향교 등이 있었던 중요지역으로 지금도 당시 관찰사나 군수 공덕비, 불망비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 또한, 언제 세워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북 부안의 당산처럼 돌로 된 오리를 깎아 세운 솟대가 있어 눈에 띈다. 읍내 한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인 유적들. 그래도 저 아래 큰길가 돌 표지판 때문에 와봤으니 다행이다.

▲수도권에서 보기 쉽지 않은 돌로 된 솟대. 오리를 깎아 세웠다.
▲수도권에서 보기 쉽지 않은 돌로 된 솟대. 오리를 깎아 세웠다.
▲관찰사 1, 군수 5, 면장 1의 공덕비가 옹기종기 세워져 있다.
▲관찰사 1, 군수 5, 면장 1의 공덕비가 옹기종기 세워져 있다.

벽제관은 당시 한양에서 의주까지 있었던 총 10개의 역관(驛館) 중 첫 번째이자, 한양으로 들어갈 때는 마지막 역관으로 당시 세계로 통하는 길인 중국을 드나드는 사신들이 머무는 중요한 곳이었다. (사적 제144호) 중요 사신의 영접을 위하여는 대군이나 정승들이 이곳까지 영접 나왔으며, 인근 왕릉을 참배하러 가던 임금이 머물던 행궁(行宮)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건물의 규모나 수준이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발굴조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잘 복원하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물론 앞머리에 언급한 돌 표지석도 새롭게 수정하기 바란다. 또한, 이곳은 역관(驛館)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 평양 탈환으로 기세를 올린 명군(明軍)이 왜군(倭軍)을 추격하여 내달리다가 격전을 치르고 크게 대패(大敗)한 곳이니 전적지(戰跡地)가 맞기는 맞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여 아쉽다.

 

출처:시니어조선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02/20141202015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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