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화폐 시작은 경복궁 중건에 발행된 당백전
인천 중구 전동에는 신식화폐를 발행‧유통시켰던 인천전환국이 있다. 인천전환국이 생긴 지 올해로 125년!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동전은 모두 가운데가 막힌 신식화폐다. 지금 내 주머니 속 동전과 125년 전 동전이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 확인하러 지금 바로 인천개항박물관 기획전시실로 가보자. 인천개항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화폐 기획전’이 열린다.
체험기획전과 함께 인천개항박물관 4전시실과 근대건축전시관의 4전시실을 함께 관람하면 백 년 전, 은행에서 일어난 숨은 비밀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4월 21일부터 6월 30일까지 진행한다.
화폐기획전을 맞아 인천 전환국에 대해 알아보자. 신식 화폐의 시작은 1862년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에서 비롯됐다. 외척세력에 밀려 추락한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경복궁 중건사업은 중요했다. 중건에 필요한 자금은 일반 백성과 종친들에게 원납전(願納錢)의 형태로 기부금을 받았고, 부역도 큰 원성을 사지 않도록 신경 쓰며 진행했다. 그러나 화재로 공사비가 부족해지자 비용 충당을 위해 동전 하나당 백배의 가치가 있는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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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냥(뒤)
고액의 화폐를 발행하자 물가는 폭등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국화폐가 유입되어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재정이 부족했던 조선정부는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를 위한 자금을 조달받기 위해 방판(幇辦: 실무자) 직위에 있던 안경수를 일본으로 파견했다. 안경수는 오사카에서 지인이었던 임유조를 만나 화폐주조문제를 상의하였고, 당시 오사카 제동회사장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를 소개받았다.
마스다는 상평통보 주조를 위한 자금은 지원하기 어렵고, 신식화폐를 발행하면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말에 조선정부와 협의하여 일본화폐와 형태, 중량, 품질이 동일한 화폐를 주조‧발행 했다.
전환국을 설치하다
조선정부는 마스다를 통해 일본정부로부터 2만700여 원을 보조금으로 기증 받고, 마스다에게 25만원의 자금을 빌려 전환국을 건축하기로 하고, 마스다를 전환국 감독으로 위임하여 운영에 참여시켰다. 일본이 신식화폐 도입에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마스다 개인의 사업 욕심도 있었지만, 조선의 경제권을 일제가 장악하려는 의도가 가장 컸다.
결국 1883년(고종20년) 7월 5일, 전환국의 설치를 결정하고 1885년 2월 종로구 연희동의 큰 집을 경성전환국 건물로 사용하다가 공간이 부족하여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신축하였다. 그러나 상평통보 한 가지 주화만 사용하던 조선사회에서 15종의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려고 하니, 신식화폐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화폐를 만드는 기술과 기계에 국가재정까지 부족하여 충분한 화폐를 만들기 어려웠다.
경성전환국에서 화폐주조기능이 무실해지자, 전환국 관리의 대부분이었던 일본인들은 조선의 화폐경제를 비교적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인천에 눈독을 들였다. 경성전환국은 7년만인 1892년(고종29)에 인천(인천시 중구 전동)으로 옮겼다.
1892년 인천으로 전환국 이전
당시 건축된 인천전환국 건물은 규모나 구조면에서 경성전환국 건물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 조선정부에서는 마스다가 전환국 운영에 손을 떼면서 마스다와 함께 감독으로 근무했던 요코세후미오(橫瀨文彦)는, 마스다의 대리자 자격으로 결정된 오미와초베에(大三輪長兵衛)가 조선인과 늘 같이 다니자 조선인과 한통속인 것으로 의심하고 업무의 인계를 거절하였다.
업무의 인계도 되지 않은 상황에 마스다가 돈과 기술을 이전해주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날로 늘어가는 화폐수요량을 충당하기 위해 국내 유일의 조폐기관인 인천전환국을 보다 확장 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과 기술적인 면에서 또다시 일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전환국을 용산으로 옮기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전환국 이전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경인철도 개통이 얼마 남지 않아 수송이 편리해졌다는 것과 일제의 경제권 독점을 지켜보던 러시아에서 일제를 강력히 견제하며 일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용산으로 이전으로 9년만에 인천시대 막 내려
전환국이 용산으로 이전이 확정되면서 1898년(광무2) 9월 25일 조선정부는 마스다와 용산전환국 건립조약을 맺고, 10월 20일에 기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용산전환국에는 인천전환국에서 사용하던 조폐시설 일체를 모두 옮기는 것으로 결정하여, 25톤 화차 6량에 해당하는 기기 등을 운반해서 9월 10일부터 백동화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천전환국에서의 화폐발행은 9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인천전환국에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1892년 총 5종의 개국 501년 화폐를 발행했는데, 당시 조선에 주재관으로 와 있던 위안스카이(遠世凱)는 소국인 조선에 ‘대’자가 기재된 것에 대해 항의하여 발행이 연기되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504년, 505년의 5푼 동화에는 다시 대조선의 국호가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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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를 법화(法貨)로서 유통 보급했던 17세기 70년대는 관청 및 관영에서 필요에 따라 주조‧유통되었을 뿐 국가의 독립된 상설조폐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17세기 말 화폐주조사업은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화폐의 화폐발행권은 큰 이권이 되어왔다. 이를 위하여 질 나쁜 화폐를 철저히 통제하여 화폐정책을 보다 안정되고 합리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중앙에 상설 조폐기관으로서 전환국을 설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