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민족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1904~1944) 선생을 상징하는 와인이 고향인 경북 안동시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선생이 대구 학생운동으로 옥고를 치를 때 받은 수인번호 264와 대표 시 청포도에 착안해 264와인으로 이름 지었다.
264와인은 안동에서 재배하는 '청수'포도 품종으로 만든다.
안동시는 선생이 태어난 도산면 원천리 일대에 청수 단지를 조성하고 2018년 와인을 시판한다.
육사는 항일투쟁과 문학 세계를 넘나들며 일제에 맞선 저항시인이다.
김원봉(1898~1958년) 선생이 이끄는 의열단 활동을 계기로 육사는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선다.
이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광주학생운동, 대구 항일격문 배포 등에 가담했다가 5차례 투옥된다.
감옥을 드나들면서도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여러 시를 발표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희망을 노래한 청포도, 광야, 꽃 등이 주요 작품이다.
청포도는 무럭무럭 익어가는 한민족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창원대 도진순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을 보면 청포도는 일종의 암호다.
육사는 가혹한 일제 탄압과 검열을 피하려고 가명과 은유 표현을 자주 썼다.
청포도 또한 와인용 포도가 아닌 덜 익어 푸른색을 띤 풋 포도라고 했다.
풋 포도는 독립을 기다리는 조선 민족이라고 도 교수는 설명한다.
육사가 평소 지인에게 한 발언을 근거로 제시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일본은 끝장난다"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1909~1942년) 장군이라는 주장도 있다.
1942년 발표된 광야는 육사가 중국 베이징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견뎌가며 쓴 유고 시다.
허형식은 하얼빈 등 27개 도시를 점령하는 전투에서 일제 군인과 경찰 1천557명을 사살하는 혁혁한 성과를 냈다.
허형식은 동북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다.
동북 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 주도로 결성된 한·중 통합 군사조직이다.
북한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도 동북 항일연군 출신이다.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허형식은 1915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0년 하얼빈에서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다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투옥된다.
이듬해 출소 뒤에는 반일 선전·조직 활동을 폭넓게 벌인다.
동북 항일연군에서는 제3로군 총참모장을 맡아 일제 토벌대를 상대로 무수한 유격전을 벌여 혁혁한 전공을 올린다.
하얼빈 등 27개 도시를 점령하는 전투에서 일제 군인과 경찰 1천557명을 사살했다.
연전연승 행진은 1940년 이후 꺾이게 된다.
일본군이 병력을 대거 증원해 무자비한 소탕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동북 항일연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러시아로 피했으나 허형식은 만주에 남아 끝까지 싸운다.
독립군이 떠나고 난 뒤 일본군에 당할 동포의 고초를 생각하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고 한다.
결사항전 각오에도 병력 열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1942년 최후를 맞는다.
북만주 경안현 청봉령 계곡에서 일본군 토벌대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마지막 모습은 처참했다.
일본군 토벌대가 머리만 떼어 가고 시신은 계곡에 방치했다.
짐승들이 시신을 물고 옮겨 다니며 뜯어 먹은 탓에 이튿날 전투현장에서 1km 떨어진 곳에 다리뼈와 권총만 남았다.
허형식은 중국에서 '만주 최후 파르티잔'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중국 정부는 1998년 허형식 기념비를 세우고 공원도 건립했다.
2014년에는 허형식을 항일영웅열사 명단에 올렸다.
국내에는 활약상은 물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다가 1993년 처음 소개됐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이 쓴 '허형식 연구' 논문 덕분이다.
장 실장도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은 허형식이라고 추정한다.
경상북도 안동시 태화동에 위치한 이육사 생가(경북민속자료 제10호). 원래 안동군 도산면에 있던 것을 1976년 4월 안동댐 수몰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허형식은 육사 어머니의 사촌 동생이다.
육사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키가 크고 잘 생겨 많은 사람이 따랐다.
허형식은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다니다가 육사를 만났다고 한다.
허형식은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왕산 허위(1854~1908년) 선생의 5촌 조카이기도 하다.
왕산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1895년 의병운동에 뛰어든다.
1908년 전국 통합의병부대 작전본부장을 맡아 서울로 진격하려다 체포돼 사형을 당한다.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는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을 당한 선생의 호를 따 이름 지었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1858~1932)과 허위는 사돈 사이다.
두 가문 직계 독립운동가만 13명에 달하지만, 가족은 모두 가난하다.
왕산 일가는 1920년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다.
후손들은 모스크바나 연해주, 중앙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어렵게 산다.
석주 집안도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으나 해방 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다.
종손들은 한때 보육원에서 생활했고 일부는 수업료를 못 내 중학교를 중퇴하기도 한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대표 사례다.
안동시가 264와인 생산을 계기로 이육사 정신을 선양하려는 시도는 괜찮아 보인다.
러시아에 흩어진 '백마 탄 초인' 후손들을 와인 수익금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왕산·석주·육사 집안이 혼맥으로 대한민국 최고 독립운동 명문가를 이룬 사실을 널리 알린다면 금상첨화다.
ha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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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7/05/04/0906000000AKR201705041250007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