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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명성황후 시해를 목격한 러시아인 세레진 사바틴...고종황제의 '보디가드' 되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5.11]



제물포구락부의 사바틴, 고종 ‘보디가드’ 되다
세창양행 사택 등 당대 최고 건축물 설계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찬바람을 가르는 총성 한발이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울렸다. 그것을 신호 삼아 일단의 일본인들이 조선왕궁을 습격했다. 순식간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된다. 경복궁 맨 끝 쪽에 있는 옥호루에 기거하던 명성황후가 잔인하게 시해된다. 그 당시 대한황실은 일제의 침탈과 위협이 워낙 극심해 경복궁 맨 뒤 건물에 숨어 있듯 기거하고 있었다. 그 외진 곳이 바로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다.

▲제물포구락부 현재 모습

일본 정부는 “왕비와 적대 관계에 있던 대원군이 기획하고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거짓 보도했다. 사건 직후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갔고 민심도 그렇게 기우는 듯했다. 그런데 반전이 된다. 결정적인 목격자가 있었다. 그것도 외국인 목격자, 바로 사바틴이었다. 황실건축가로 잘 알려진 바로 그 러시아인 세레진 사바틴(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 1860~1921)이다.


사건당일 궁정경비하면서  황후 시해 현장 목격
경복궁에 머물고 있던 사바틴은 그 참담한 광경을 처음부터 목격했다. 사바틴은 어떻게 궁궐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할 수 있었을까. 당시 경복궁에는 궁궐 수비 책임을 맡았던 몇몇 미국인과 유럽인 등 서양인들이 있었다. 요즘 개념으로 보면 용병 경호원들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의 위협을 느껴 궁궐에 서양관을 짓고 외국인들을 머물게 했다. 그 중 몇 명은 아예 호위대원으로 임명했다. 궁궐에 외국인이 있으면 그들의 눈을 의식해 일본이 함부로 위협을 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 출신 건축가에게 경비와 경호를 맡길 정도로 조선의 국운은 크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사바틴은 사건 당일 궁정 경비 업무를 담당하던 중 그 현장을 목격했고 사건의 결정적인 증인이 되었다.
시해 사건 이틀 후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본국에 이를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는 현장에 있던 사바틴의 증언도 첨부돼 있다. 그는 직접 그린 도면을 통해 일본의 궁궐 침입 경로 등을 밝혔다. 러시아황제 니콜라이는 300여 쪽의 보고서를 다 읽고 나서 매우 격분했다고 한다. 보고서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왕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 했다’
시해 사건의 주범들은 일본인 낭인들로 밝혀졌다. 낭인들은 깡패나 무뢰한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건 사실과 전혀 다르다. 낭인은 대륙 침략을 위해 현지를 돌며 정보를 수집하고 행동하는 재야 정치인들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원 중에는 한성신보 주필, 일본 신문 특파원을 비롯해 하버드대 출신도 있고 영어와 불어를 할 수 있는 일종의 극우분자 엘리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실제로 사바틴은 현장에서 영어로 그들과 소통했다고 증언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 단계에서부터 적극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이다.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황후 시신의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다. 유해 일부는 그의 지시로 증거 인멸을 위해 땅에 묻어버렸다. 시해 사건 후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일본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1903년 말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육종학자 우장춘이다. 우장춘은 아버지의 과오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6·25 전쟁 중에 귀국해 일생을 한국의 농업 발달에 힘썼다.


▲제물포부두 축조현장

인천에서 해관원으로 일하면서 부두 축조공사 감독
국운이 크게 기울어진 상태에서 조선 정부는 유럽식 공간과 관청의 건축을 위해 서양 건축가들을 불러 들였다. 사바틴은 그 중 한명이었다. 1860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항해사 양성 강습소를 수료한 후 예술 아카데미에 1년간 다녔다. 이후 선박 항해사로 취업하여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던 끝에 1883년 9월 17일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당시 나이 23세의 젊은이였다.
사바틴은 조선 정부의 통상과 외교를 담당하던 독일인 뮐렌도르프에게 발탁되었다. 조선의 총리아문 참의(정3품)로 임용된 뮐렌도르프는 궁정에서 필요한 서양 건축기술자를 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출장을 갔다. 조선에 취직하기 원하는 젊은 외국인들이 매일 같이 그를 찾아왔다. 그곳에서 상하이 주재 오스트리아 총영사 하스가 추천한 사바틴을 만나 그를 채용했다.
사바틴은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1883년 인천으로 입국했을 당시만 해도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자리를 구하던 단순 기술자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정규 건축 교육은 받지 않았다. 상하이에 머물면서 측량 및 토목·건축 기술을 습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 입국 당시 사바틴은 건축기사가 아닌 영조교사(營造敎士)라는 직명으로 조선 정부와 고용 계약을 했다. ‘영조’는 집 따위를 짓거나 물건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에게 ‘교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조선정부는 사바틴의 고용을 통해 향후 서양건축술을 조선인에게 가르칠 계획까지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사바틴은 가족과 함께 인천에 터를 잡았다. 왕궁 도면을 작성하고 서양 벽돌과 이엉지붕을 만드는 계획안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계획안은 백지화 됐다. 경비가 많이 들어 실행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사바틴은 인천해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당시 인천해관은 해관장부터 직원들 까지 대부분 외국인들이 오늘날의 ‘세관’ 업무를 맡고 있었다. 
해관원으로 신분이 바뀐 사바틴은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제물포 부두 축조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시작했다. 짐 꾸러미에 처박혀 있던 콤파스와 측량자 등 설계 도구를 다시 꺼내 해관청사(1883)를 직접 설계했다. 이어서 현재의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터에 있던 독일 무역상사 세창양행 사택(1884)의 설계를 맡게 됐다.
일 년 후 사바틴이 설계한 서울 정동의 (구)러시아공사관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러시아 공사관은 조선 수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사바틴이 인천에서 한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발판이 되었다. 인천해관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한성으로 출장 다니며 서양식 건물 관문각 등 다양한 건축·토목 작업을 이어온다. 1888년 그는 조계지인 제물포의 측량조사도 함께 진행해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지도’를 완성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최초의 도시계획이라 할 수 있다. 그해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및 청국이 서명한 지도에 제작자인 사바틴도 서명을 남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만국공원 설계 조성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은 답답했다. 여러 가지 정황상 함부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한가롭게 산책을 할 수 있는 공원이 절실했다. 사바틴은 외국인들을 위한 공원 청사진을 마련한다. 외국인 거주지와 인접한 응봉산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건 몰라도 조망 하나만은 최고였다. 1888년 그는 잡풀 더미 민둥산 언덕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을 설계하고 조성한다. 폐허가 된 사찰 부지를 활용하여 서양인이 설계한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섰다. 서구열강에 의해 개항된 상하이(1843), 요코하마(1859), 인천(1883) 등 동아시아 3개국 개항 도시에는 모두 ‘만국공원(Public Garden)’이 공통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공원 분위기도 흡사하다.
당시 만국공원 주변에는 웅장한 서구식 건물이 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계 세창양행의 사택, 각 국 사람들의 사교클럽인 제물포구락부, 영국인의 여름 별장이었던 존스톤별장(인천각), 응봉산 마루에 있던 인천관측소, 사이토 총독의 별장으로도 사용됐던 파울바우먼 주택 등이 자리 잡았다. 조선 땅에서는 인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국적이고 화려한 서구식 건물들이었다.


▲ 제물포 각국 조계지도. 오른쪽 아래가 일본조계,왼쪽 구릉지대가 청국조계, 그리고 응봉산(만국공원)아래 노란부분이 각국조계다.

탄탄대로를 걷던 사바틴의 삶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는 조선 관원과의 불화와 봉급 문제에 시달렸다. 임금이 체불돼 빚을 내서 생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공사의 외교 공문에는 ‘사바틴은 한·중·일 상인들로부터 외상으로 산 식품비의 독촉까지 시달리는 형편이며 심지어 이들 상인이 러시아 공사한테 까지 사바틴의 빚 독촉 항의를 한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그는 1893년 러시아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를 만류하고 결국 1893년 10월 인천해관으로 복직하게 된다. 고종은 “이 사람을 해관에 두어 물품의 접수와 사용하는 일을 맡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명을 내렸다.




▲세창양행 사택




1894년 6월부터는 미국인 퇴역장군 다이와 함께 경복궁 시위대를 지휘하게 됐다. 고종은 건물을 짓는 것 보다 사바틴이 자신을 보호해 주는 일이 더 절실했다. 일본군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외국인을 경복궁 시위대의 대장으로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바틴은 궁으로 1주일에 4일씩 저녁 7시에 출근해 아침에 퇴근했다. 이 때문에 그는 1895년 10월 8일 벌어진 을미사변을 목격한 외국인 2명 중 1명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1902년 ‘제물포구락부’ 완성후 20년 조선생활 마감
을미사변을 목격하면서 정치적으로 한동안 곤욕을 치른 사바틴은 1896년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발주한 ‘독립문’ 설계를 시작으로 다시 본연의 건축가로 돌아간다. 독립문 완공 후 바로 이어서 영국 무역상사 홈링거양행 인천지사 사옥(1898)을 건설했다. 홈링거 양행은 러시아의 동청해상기선회사의 인천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건축 건을 계기로 그 회사의 인천지점장으로 취직했다. 건축일은 한시적이므로 생활고 해결을 위해 아예 직장에 취직한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다시 거주지를 옮겼다.




▲만국공원에 있던 테니스장. 오로지 서구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인천에 다시 정착한 후 사바틴은 그의 마지막 작품을 인천에서 완성한다. 1902년에 건축한 제물포구락부이다. 구락부란 말은 클럽(CLUB)의 일본식 발음을 한자로 차용한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제물포구락부는 외교관과 외국인 무역상 등의 친목을 위해 만든 사교클럽이었다. 그들은 책을 읽고, 당구·테니스를 치고, 함께 술을 마시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조선의 기방 문화, 일본의 요정 문화와는 다른 공간이 필요했다.
미국인 데쉴러, 독일인 뤼일리스 등은 친목을 위한 클럽을 만들기로 하고 자금을 모았다. 이들은 건축 자금이 모이자 곧바로 사바틴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건설에 들어가 1902년 인천항이 내다보이는 응봉산 중턱에 제물포구락부를 개장했다. 넓은 당구장과 독서실, 그리고 근처에 테니스장을 갖췄다. 매달 10일에 만찬을 곁들여 연회를 열고 회원간 담소 혹은 유명 인사의 연설 경청 등으로 친목을 도모했다. 일본인들은 회원자격이 있었으나 끼지 못했다. 언어, 매너, 풍습, 네트워크 등을 따라가지 못해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결국 ‘구락부’라는 일본말투의 공간이 생겼지만 그들은 자기들만의 사교장을 따로 갖게 된다. 결국 제물포구락부는 서양인 전용의 시설이 되었다. 사바틴의 ‘작품’ 중 현재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사바틴은 1902년 7월 대한제국으로부터 3년간 강화도 화강암 채석 이권을 획득했다. 아마 그의 건축물에 화강암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예 채석권 까지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러일전행 패전 후 제물포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러시아인들




살림도 나아지고 명성도 쌓은 그는 인천에서 뼈를 묻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진다. 1904년 인천 앞바다에서 제물포해전(러일전쟁)이 터진다. 그날 그 시간, 사바틴은 어디에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만약 인천에 있었다면 자국의 패배를 두 눈으로 생생히 보았을 것이다. 러시아가 패하자 조선에 있던 패전국민 러시아인들은 서둘러 보따리를 싸야했다. 사바틴은 가족과 함께 프랑스 순양함을 타고 인천에서 상하이로 갔다가 여기서 다시 배를 타고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고향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 20년간의 파란만장한 사바틴의 조선 생활도 그렇게 마감되었다. 



원고출처 : ‘시대의 길목 개항장’(유동현 著) 

원문보기
http://enews.incheon.go.kr/publish/php/articleview.php?idx=12141&section=11&diaryDate=2017-05-09&chapt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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