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만난 서울 인사동 한 고미술업자는 녹이 퍼렇게 슨 금속활자 10여점을 꺼내 보였다. 크기는 모두 성인 남성 검지 손톱만 했다. 그는 "중국에서 입수한 가짜 증도가자(證道歌字·고려시대 금속활자)"라고 했다. "등급으로 따지면 A, B, C급 중 B급 정도 될 거예요. B급은 개당 수백만원씩 팔 수 있었는데, 이번에 다른 증도가자가 보물 지정을 받지 못하면서 똥값 됐어요. 10만원까지 떨어졌는데도 안 팔려요. 7~8년 전부터 고려시대 금속활자라면서 고미술품 시장에 수천 개가 풀렸는데 거의 모두 중국산 짝퉁이라고 보면 됩니다."
증도가는 고려시대 불경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의 줄임말로 증도가자는 이를 찍은 금속활자를 뜻한다. 지난 2010년 금속활자 12점이 증도가자라면서 공개됐는데, 일부 학자들은 증도가 목판본 기록을 근거로 이 활자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1377년 간행)보다 최소 138년 이상 앞서는 금속활자라고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7년간 심의 끝에 지난 4월 증도가자 보물 지정을 부결했다. 이후에도 소장자와 일부 학자는 진짜 증도가자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부 학자와 고미술품상들은 중국에서 만든 명백한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보물이냐 짝퉁이냐
문화재청은 "해당 활자가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출처와 소장 경위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증도가자로 알려진 금속활자는 2010년 9월 김종춘 한국고미술협회장이 운영하는 고미술품 상점 '다보성 갤러리'에서 처음 공개됐다. 당시 김 회장은 금속활자 주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소장자가 일본에서 매입해 왔다"고 밝혔다. 고미술품 시장에서 김 회장이 금속활자의 실소유주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김 회장은 당시 언론에 "나는 그 물건을 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후 13개월 뒤인 2011년 10월 6일 이모씨가 문화재청에 자신의 소유 금속활자 101점을 증도가자라고 주장하며 문화재 지정 신청을 했다. 이씨는 김 회장의 아내다.
처음 이씨는 금속활자가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출됐고 이후 오사카 노부로(일본 고미술상)→김모씨(대구 고미술상·2007년 사망)→김모씨(대구 모 종합병원 내과의사)→이모씨(김 회장 처남)를 거쳐 자신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고 문화재청에 설명했다. 이에 대해 2007년 사망한 고미술상 김씨 아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김씨 아내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은 그런 물건(증도가자)을 취급한 적이 없다"며 "남편은 원래 지병이 있어 평생 일본에 다니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는 "죽은 사람 말 없으니까 떠넘기는 것 같다"고도 했다.
문화재청은 취득 경위가 불분명하다고 보고 2013년 다시 소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이씨는 "증도가자는 오사카 노부로가 아니라 구키야 마코토씨가 소유했던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또 거래 과정에서 마코토씨와 2007년 사망한 고미술상 김씨 사이에 박모(고미술품상)씨가 새로 등장했다. 박씨는 문화재청에 "1995년 일본 오사카에서 골동품점을 하는 구키야 마코토씨에게서 금속활자를 매입한 뒤 대구 고미술품상 김씨에게 매매를 위탁했었다"고 밝혔다.
"北에서 출토돼 日 거쳐 온 진품"
고미술 시장에선 김 회장이 고미술상 황모씨로부터 금속활자를 샀다는 얘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인사동의 한 고미술상은 "황씨가 증도가자를 담보로 나에게서 돈 3500만원을 꿔갔는데, 김 회장에게 판다면서 이를 다시 가져갔다"고 했다. 이에 대해 황씨는 본지 통화에서 "김 회장에게 절대 판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는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고려활자 42개를 중국에서 사서 한국에 들여온 건 맞는다"면서도 "김 회장에게 보여줬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증도가자)과 (가격이) 맞지 않는다고 안 사더라"고 말했다. 황씨는 "나는 비싸게 달라고 그랬는데 (김 회장은) 자기가 싸게 샀기 때문에 안 산 것 같다"고 말했다. 황씨는 "당시 고려활자 1개당 2000만원씩 42개를 총 8억4000만원에 김 회장에게 팔려고 했다"고 밝혔다.
김종춘 회장은 이에 대한 수차례 본지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김 회장은 평소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지정된 수많은 문화재 소장 경위는 모두 명확한가"라고 되묻곤 했다. 황권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은 "보물 지정 과정에서 모든 소유자에게 출처와 소장 경위를 꼼꼼하게 따진다"며 "특히 해당 활자가 진짜 증도가자로 판명될 경우 세계 인쇄사의 일대 사건인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문화재청 "진짜로 보기 어렵다"
문화재청은 출처 소장 경위 외에도 서체, 주조 방법 등 활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증도가자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이 활자로 현존하는 증도가를 인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회장과 일부 학자는 여전히 "증도가자가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재청도 해당 활자가 고려시대 만들어진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열어뒀다. 활자에 묻어 있었던 먹을 한국지질자원연구원과 일본 팔레오 라보사(社), 서울대 등 국내외 3개 기관에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의뢰한 결과 삼국시대~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미술학계와 고미술 시장에선 "먹으로 고미술품 연대 측정을 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문화재 보존과학을 전공한 한 교수는 "나무 재를 통한 탄소연대 측정은 오차 범위가 너무 크다"며 "1000년 된 먹을 구해 활자에 발랐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미술품 진위 여부 판단에 참고하기 위해 한국·일본·중국에서 시판 중인 먹 10개를 구입한 뒤 각각 일부를 떼어내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이씨 활자를 분석했던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탄소연대 측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경우 먹에 따라 240년 전, 길게는 3만6750년 전 물건으로 측정됐다. 한국과학기술원은 각각 355년 전과 3만3706년 전으로 나왔다. 두 기관 측정치 차이는 먹별로 최소 115년에서 최대 4419년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는 "먹끼리 섞어 연대를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중국서 가짜 금속활자 수백개씩 거래"
중국을 오가며 고미술품을 사고파는 김모씨는 "한때 중국 고미술 시장에선 고려시대 금속활자라면서 한꺼번에 수십~수백개씩 거래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짜 활자의 경우 녹이 슨 것으로 위장하려고 염산 같은 산성 물질을 활자에 뿌린 뒤 수년 동안 땅속에 묻어두기도 한다"고 했다.
고미술상들에 따르면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 중국에서 우리 고미술품이 위조돼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북한에서 외화벌이 수단으로 만든 가짜 고미술품도 중국을 거쳐 들어오고 있다. 한 고미술상은 "한국에서 만든 가짜 고미술품이 중국으로 흘러나갔다가 북한에서 출토된 진품으로 포장돼 다시 들어오기도 한다"고 했다. 북한에서 나왔다는 걸 보여주려고 고미술품과 북한군 계급장을 함께 보여주는 상인들도 있다고 한다.
일부 사기업자들은 고미술품에서 위조하기 힘든 부분을 일부러 부순 뒤 수리하는 방식을 쓰기도 한다. 최근 KBS 1TV 'TV쇼 진품명품'에서 감정가 2억원을 받았지만 진위 논란이 일고 있는 '게 연적(硯滴)'〈본지 6월 24일자 C3면〉의 경우 이 같은 의혹을 받고 있다. 방송에 나오기 전 그 연적을 봤다는 한 고미술품상은 "연적 아래 굽 부분이 가장 위조하기 힘든 부분인데, 그 연적의 경우 게 다리 등 약한 부분은 안 부서지고 가장 단단한 굽 부분만 날카롭게 잘려 나가 있었다"고 했다. 이 연적이 진품명품에 나왔을 때는 이 부분이 말끔하게 수리돼 있었다.
고미술학자와 고미술품상들은 외국에서 들어오는 고미술품을 철저하게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공항과 항만에는 문화재청에서 파견한 감정위원이 있다. 이들의 임무는 50년 이상 된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는 것이다.
관세청은 100년 이상 된 도자기, 불상, 조각, 공예품의 경우 관세와 부가세를 매기지 않고 100년 미만의 경우에만 관세 8%, 부가세 10%를 부과하고 있다. 100년 이상 또는 미만 감정은 공항·항만에 파견된 문화재청 직원이 담당하는데, 무작위로 짐 검사를 하거나 입국자가 알아서 신고했을 때만 실시한다고 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좋은 문화재는 들어올수록 좋고 나갈수록 나쁘다는 취지에서 반입은 쉽고 반출은 까다롭게 규정이 만들어진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같은 규정 때문에 이씨 금속활자에 대한 반입증명서 같은 서류가 아예 없어 국내로 들어온 경로를 따져볼 수 없었다.
인천항 문화재감정관실 이숙희 감정위원은 "입국할 때 일부러 고미술품을 신고하거나 외국에 나가는 척하고 감정을 맡기는 사람들도 있 다"고 했다. 고미술품 감정은 사단법인 한국고미술협회에서만 실시하는데, 이 단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편법을 쓰는 셈이다. 문화재청은 사적 감정을 금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문화재 반출뿐 아니라 반입 규정을 강화해 국내에 들어오는 문화재를 추적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또 고미술에 대한 국가 공인 고미술 감정 기구 신설도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