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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삶으로 보는 역사 : 이단자 태종 이방원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8.03]



삶으로 보는 역사 : 4-16 이단자 태종 이방원
삶으로 보는 역사 : 4장 새 노래를 부르다
 
<16> 이단자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조선을 낳은 이는 태조 이성계이나
조선을 일으켜 세운 이는 태종 이방원이다.
 
그런데 태종 이방원이 다스리던 조선은
이성계의 조선이나 태종 이후 조선과는
나라 이름은 같으나 내용은 전혀 같지 않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엘리자베스 2세의 영국이
나라 이름은 같으나 전혀 다른 영국인 것처럼.
 
이성계의 조선은 정도전이 구현하려 했던
민본정치를 앞세우며 백성에게 손을 내미는
'왕도정치의 조선'을 지향했다.
 
태종 이후의 조선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세우고
백성에게 다가가는 정치를 으뜸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방원의 조선은 절대 왕권으로
법률과 형벌을 앞세워 주먹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의 조선'이었다.

그러니 태종 이방원이
조선의 정치와 사회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과는 맞지 않으니 틀렸다.

이방원이 세자인 동생 이방석을 죽인 사건은
세자 자리에 대한 불만과 함께
재상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왕도정치에 대한
심리적 반발도 같이 묻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역사의 중심에 선 패권자가 되어
자신의 뜻대로 역사를 이끌고 싶은 욕망을
가슴 안에 활화산처럼 품고 있었다.
 
자신이 세운 뜻 이외에
다른 그 어느 것도 보지 않는 사람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이런 시를 보냈으니
아이러니도 참 지독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천년만년 누리리라.

 
본인은 전혀 얽혀 사는 삶이 아니면서
남에게는 이런들 저런들 어떠리 하고서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니
얼마나 자기중심적 인물인지 알만하지 않은가.
  
그가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죽인 사례를 보자.
 
1) 정몽주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정도전의 역성혁명을 놓고 정적이 된 후
이성계와 정도전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그때 이방원의 나이 25살이었다.
 
이방원이 왕이 된 후에는
왕에 대한 충성심의 모범으로 그를 세우고
신하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으로 추증했다.
 
신하들에게 일백번 고쳐 죽어도
백성이 아닌 오직 임금만 바라보고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가르치려 한 것이다.
 
정몽주와 둘이서 주고받은 시를
후세에 전한 이가 그 시로 그를 죽인 이이니 
패도정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설이다.
 
2) 정도전
조선에 성리학을 정착시켜 국교로 삼으면서
지금까지 유교관습이 살아있게 한 장본인이다.
 
세자인 이방석이 살해될 때 같이 죽었는데
태종은 그를 만고의 역적으로 매도하여
조선왕조 내내 버림받다가
조선조 말인 고종시대 복권되었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전각 배치와 이름에도
왕이 군자가 되어 백성을 위해
정사를 펼치는 것을 근본으로 했다.

사람이 싫으면 그의 모든 게 싫어진다.
태종은 정도전이 왕도정치를 지향하며 지은
경복궁이 싫어 나홀로를 위해 그곳을 버렸다.

왕에게 간섭하는 행정부서와는 멀리 하면서
자신의 뜻에 따라 새로 지은 창덕궁에서
왕의 뜻대로 하는 패도정치를 펼쳤다.
 
3) 이방석과 이방번
왕으로 등극한 태조 이성계는
강씨를 왕비로 책봉해 정비로 삼고
그녀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조선을 건국한 지 5년만에 강씨가 사망하자
이방원이 주도한 반란으로 이들 형제도 죽고
이성계도 왕위를 버리고 한양을 떠났다.
그때가 이방원이 31살 때였다.
 
여기까지는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왕이 되기 위해 반대세력을 죽인 경우이다.
 
정몽주는 고려 개혁 동지였고
정도전은 조선 개국 동지였고
이방석과 이방번은 이복형제였다.
 
33살에 왕이 된 후에는
왕으로서 자기 뜻을 세우기 위해
다시 많은 혁명동지들을 쫓아내고 죽였다.

심복도 있었고 처가식구들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아버지나 계모나 형제들조차
그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4) 원경왕후 민씨 친가
이성계가 함흥에서 개경으로 들어온 후
귀족가문인 진주 강씨 집안과 혼인하고
개경의 귀족사회와 인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4째 이방간은 문하찬성사 민선의 딸과 혼인하고
5째 이방원은 민제의 집에 가서 학문을 배우며
스승의 딸과 혼인하고 처가에서 자식을 키웠다.
 
왕이 된 후 외가에서 자라 외가 추억이 많은
세자 양녕에게 끼칠 외숙들의 영향을 우려해
스승의 아들이며 혁명 동지였던
민무구 4형제를 모두 반역으로 몰아 죽였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후에는
아들 왕의 처가 세력이 커지는 걸 경계해
그는 다시 칼날을 세웠다.
 
5) 소헌왕후 심씨 친가
세종이 즉위하고 4개월 뒤에
그의 장인인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그 집안을 천민으로 강등시켰다.
 
소헌왕후가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로
52살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수양대군이 할아버지가 하던 방식 그대로
골육상잔의 난을 일으키는 빌미가 만들어졌다.
 

태종은 정도전이 지은 경복궁이 싫어 창덕궁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살았다.

왕권의 확립이 역사의 모든 것인 양
왕권에 저해된다고 여기는 요소를 없애는데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자기 뜻을 세우려 하는 사람에게
역사가 가야 할 길을 맡기지 않는다.
 
러시아를 서구화시키려고 북해 연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우고
수도로 삼은 표트르1세는
여러 면에서 태종 이방원을 닮았다.
 
아버지 표트르1세의 서구화 정책에
황태자 알렉세이가 반기를 들자 그를 죽이고
그의 후손이 자기 뒤를 잇는 걸 막으려 했다.
 
억지로 계비 예카 카테리나로 황위를 이었으나
그녀가 2년만에 병으로 죽고
그가 죽인 알렉세이의 아들이 황제가 됐다.
 
표트르2세는 죽은 아버지 노선을 따르면서
할아버지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를 다시 러시아의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여황제가 잇는데
그녀는 표트르1세가 내쫓았던
이복형 이반5세의 딸 이바노브나였다.
 
뜻을 세울 수는 있으나
이루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는데
표트르1세나 태종 이방원도 이 경우이다.
 
표트르1세의 러시아 서구화 정치노선은
곡절은 있었어도 오늘날까지 이어졌으나
태종이 피 흘리며 만든 패도정치 체제는
그의 사후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기틀을 놓은 게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전두환처럼
역사 흐름을 잠시 바꿨던 이단자였다.
 
그의 사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 보자.
원문보기
http://news.joins.com/article/217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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