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무너진 태종의 꿈
태종 이방원은
왜 그리도 적자혈통 왕실을 내세웠을까?
아버지 이성계가 아는 이 하나 없는 개경에서
정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계모 강씨 가문의 후원이 있었다.
강씨는 이성계의 2자보다 1살 많았는데
개경에서 강씨와 결혼 후 3자부터는
모두 개경 귀족집안과 혼인을 맺게 된다.
3자는 지방관이었던 최인두의 딸과
4자는 문하찬성사였던 민선의 딸과
5자는 예의판서였던 민제의 딸과 혼인하고
딸 경순은 고려의 최고 실력자였던
이인임의 조카와 혼인시켰다.
고려에서는 일부일처제인 조선과 달리
부인을 여러 명을 둘 수 있었기 때문에
강씨는 첩이 아니라 제2부인이었다.
강씨 소생의 이방석이 세자가 되면서
11살 위의 계모를 증오했던 이방원은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계모 강씨를
아버지의 첩으로 강등시켰다.
그녀의 '정릉'은 묘로 등급을 내려 이장하고
죽인 세자는 서자 지위로 만들면서
적자혈통 왕실로 반란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피를 흘려가며 이룬 그의 야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물거품이 될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왕이 될 세자 양녕이
자신의 꿈을 깨뜨릴 위험을 내보이자
후계자로 3자 충녕을 세웠다.
그런데 후계자 충녕은
그가 꾸던 조선의 태평성대는 열었지만
그가 걸은 길은 태종이 바라던 길과 달랐다.
그의 꿈의 허망함을 깨뜨리는 데는
그의 손자도 한 몫을 했으니
그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수양대군은
강력해야 할 적통 왕을 반란으로 죽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이후에는
적장자로 잇는 소위 적통 왕 시대는 끝나고
잠시 2자로 왕권이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적자 왕자마저 끊어지고
하성군이후에는 서자 출신이 왕위에 오르니
적자로 왕위를 잇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왕자의 난의 태종의 변명이 우습게 됐다.
조선에서 적자 왕자는 점차 사라지고
후궁출신 서자 왕자만 늘어난 것도
나름 태종에게서 비롯됐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하늘이 낸다 해서
천문을 보고 천시(天時)를 따져
왕과 왕비의 합궁이 이뤄지기 시작한 게
바로 태종시대부터이다.
흔히 조선의 풍수지리를 논하는 이들은
북악을 주산으로 한 경복궁의 풍수지리로
조선 왕실의 적자가 곤궁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경복궁을 주거지로 삼은 왕은
세종과 문종시대이고
세조 이후 대부분 왕은 창덕궁에 살았다.
더군다나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불탄 후
터만 남았지 집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었다.
280년이 지난 1872년 조선조 말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하니
조선조 518년중 280년간 사라졌었다.
그러니 왕비태생 왕자가 적은 것을
창덕궁터를 탓하면 탓해야지
경복궁터를 탓하는 지리(地利)도 맞지 않다.
자식의 출산은 천시와 지리가 아니라
몸의 생물학적 리듬이 결정적 역할을 하니
인화(人和)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부부가 함께 잠드는 것을
하늘을 보고 정했으니
왕비태생의 왕자가 적을 수 밖에 없다.
반면에 후궁 침소에는 하늘과 관계없이
왕의 몸의 시간에 맞춰 수시로 들렀으니
후궁태생 왕자가 많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조선이 국교로 정한 유학에서도
맹자가 이르기를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했다.
하늘만 바라보고 땅을 탓하다가
가장 중요한 사람을 버렸으니
왕비태생 적자 왕자가 줄어든 걸 누굴 탓하랴.
왕의 권위를 높인다고
왕비의 친정식구를 모조리 죽이기까지 했는데
사람을 버린 왕권강화는 세도정치로 돌아왔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순조 이후에
왕비 친정의 권력이 왕권보다 더 커졌으니
그가 품은 야망의 끝이 더없이 허망할 뿐이다.
그러나 그가 품었다 무너져 내린 야망이
어찌 적자 혈통의
강력한 왕실의 꿈만이었을까?
그가 꾸었으나 조선의 족쇄가 된 꿈도 있으니
적자혈통 왕실보다 더 허망했던
무너져야만 할 그의 꿈 속으로 들어가 보자.

http://news.joins.com/article/218023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