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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문화유산 답사기]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조선왕릉 1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8.09]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탐방(1)


2009년 6월 30일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 40기가 '유교적 ·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지금까지 600여년을 이어온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 오고 있는 점' 등의 독특하고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이번호부터 필자는 이들 15개지구에 있는 40여기의 조선왕릉을 둘러보기로 한다.


1. 조선의 창건왕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과 그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호는 건원릉이다.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자리는 조선 개국의 실력자이며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거쳐 왕권을 잡은 태종(이방원)에 의해 결정된 곳이다.



원래 태조는 그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한양 도성안 경복궁 서남방의 황화방(皇華坊;현 영국대사관저 주변)에 신덕왕후의 능침을 만들고 자신의 능침도 우측에 조성해 놓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태종은 부친이 미리 잡아 조성해 놓은 수릉(壽陵)에 모시지 않고 도성 밖 동북방에 있는 양주의 검암산 아래 현재의 자리에 태조릉을 조영했다. 도성 안에 있던 아버지 태조의 수릉을 옮긴 것은 수릉을 옮김으로서 그의 계모 신덕왕후의 능을 파기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태종은 도성 안에는 왕실이나 사가의 무덤을 못 쓰게 했고, 도성 10리 밖에 능역을 조성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후에 경국대전에 법문화 된다. 그래서 지금도 서울의 도성 안에는 왕릉이나 무덤이 한 기도 없다.


태조건원릉의 전경(사진 문화재청,2007)



태상왕(이성계)은 1408년 5월 24일 새벽 창덕궁 광연루 아래 별전에서 74세를 일기로 승하하셨다.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35년 10월 11일 함경도 화령부 흑석리에서 아버지 이자춘과 어머니 최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는 제왕이 되기 이전의 이름이며, 왕실에서의 이름은 단(旦)1)이고 호는 송헌(松軒)이다. 송헌은 그의 친구 이색2)이 그의 사저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지어준 것이라고 전한다.




이성계는 대대로 내려온 화령부의 무인 집안으로 원 쇠퇴기인 1356년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 수복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을 외적을 격퇴하며 전쟁터에서 산 맹장이었다. 위화도회군의 성공으로 고려(34왕 474년)왕조를 무너뜨리고 1392년 7월 17일 조선을 건국하였다. 1394년 10월 28일 한양에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천도하였다. 즉위 직후에 태조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등극에 최대 공로자인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 정도전을 제거하였다.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노년을 고통스러운 날들로 보낸다.


재위기간 6년 2개월 만이다. 2년 뒤 1400년 정월에 이방원은 바로 위의 넷째 형인 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세제로 책봉되고 그해 11월 왕위에 오르자, 방원에 대한 태조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옥새도 물려주지 않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간다. 이때 이방원이 문안을 위하여 보낸 차사를 죽여 버려 '함흥차사'라는 말까지 유래된다. 이후 태상왕(태조)의 친구인 무학대사의 권유로 1402년 한양으로 돌아와 불도에 정진하다가 승하하였다.


태조의 국장 총책임자인 총호사는 영의정부사 하륜(河崙)이 맡았다. 승하 후 태상왕의 시호(諡號)는 그의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여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 하였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묘호(廟號)는 왕으로서의 덕목을 나타내는 것으로 '태조(太祖)'라 하고 능의 이름은 개국왕 임을 고려하여 세글자의 능호(陵號)인 '건원릉(健元陵)'이라 했다.


건원릉 입구



건원릉 소전대



태조의 조문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와 임관 등이 건원릉 능침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 것인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형 같다."고 감탄하였다. 풍수가들은 이곳을 '주산은 금수형(金水形)이며, 용맥은 장유형(長乳形)이고, 형국은 청룡승천형(靑龍昇天形)'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동구릉 입구에는 여의주형의 방지원도의 연못이 두 개나 조성되어 있다. 이런 형국에서 여의주를 얻지 못하면 승천하지 못한다고 한다. 동구릉 좌편에 흐르는 물길의 이름은 왕숙천(王宿川)이다.


건원릉은 고려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따르고 있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 등은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일정한 변화를 주어 새 왕조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고 장명등이 사각에서 팔각으로 변하는 형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아울러 조선의 통치철학이었던 유교의 예에 따라 정자각 전면의 향어로, 뒷면의 신로설치, 정자각 뒤편에 망료위와 예감 등을 설치하였다. 건원릉에는 능침을 둘러싼 송림과 능침 앞으로 시야가 탁 트이는 열린 경관이 아름답다. 앞에 펼쳐진 능선들은 신하가 읍조리는 형상이라고도 하며, 여러 겹의 능선들을 꽃잎으로 보고 능침을 꽃심으로 보기도 한다. 병풍석을 두른 봉분위의 흙과 억새풀은 이성계의 고향 함흥의 것을 가져다 조영한 것으로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봉분위의 억새풀은 태조의 유언에 따라 벌초하지 않고 4월 5일 한식 때만 1회하는 것이 특이하다. 가을에 흰색 억새풀이 바람에 휘날리는 날이면 마치 이성계가 요동 벌판을 말달리던 맹장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고려릉의 사각장명등이 조선으로 오면서 팔각장명등으로 변한다.  건원릉의 장명등(사진 문화재청)


태조의 첫째부인 신의황후 한씨의 능은 능호를 제릉(齊陵)으로 하고 북한의 개성군 판문면 상도리에 있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호는 정릉(貞陵)이며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신의황후 제릉은 북한에 있어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다. 신덕왕후의 정릉에 대하여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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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계란 왕이 되기 전의 이름이다. 왕이 된 후 왕실에서는 외자의 이름을 쓴다. 외자로 하는 것은 사가와 다른 이름으로 하여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지금도 황세손의 이름을 외자로 한다.

2) 고려의 삼은(온건개혁파: 정몽주계열, 1396년 여주 신륵사에서 사망)






2.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정릉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4년 후인 1396년 4월 6일, 태조는 광주(廣州)를 지나다 수릉(생전에 가묘로 자기의 무덤을 조성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것) 자리를 둘러본다. 조선 개국을 같이한 경처 신덕왕후 강씨와 영원히 함께 할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돼 개경의 부인을 경처라 하고, 고향에는 향처를 두었다. 신덕왕후가 경처이며 신의황후는 향처였다.


태조와 신덕왕후는 우물가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성계가 장수였을 시절 목마름에 지쳐 어느 우물가에 급히 말을 세웠다. 때마침 우물가에서 물을 길던 한 여인에게 물을 청한다. 이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떠 그 위에 버드나무 잎을 따서 띄운 뒤 남자에게 권한다.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할까 그랬다는 여인의 설명을 듣고 이성계는 탄복하여 청혼을 한다.


1396년 8월 9일, 신덕왕후의 병세가 위독해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8월 12일 밤 태조가 지켜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열흘 뒤 태조는 취현방(聚賢坊: 현 중구 정동 영국 대사관 부근)에 능지를 결정했다. 현비 강씨 능의 존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했다. 태조는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할 유택 조영 과정에 수 차례 현장에 나와 진두지휘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들였다. 장례 후에도 태조는 왕비를 잊지 못하고 여러 차례 정릉에 거동하고 능침사찰인 흥천사를 세우고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조선최초(1396)의 정릉 석물은 파묘 후 청계천 광통교 축조에 사용되었다.(문화재청)


청계천의 광통교(원래는 신덕왕후 정릉의 능침석물이었다.)


그러나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치르며 왕권을 잡은 이방원(태종)은 1406년 아버지 태조가 공들여 조성한 정릉의 능역이 넓다며 능에서 100보 밖에 집을 짓도록 허용했으며 1408년 9월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수릉이 아닌 건원릉에 모시고, 1409년 2월 23일 기다렸다는 듯이 계모인 신덕왕후의 정릉에 대해 "옛 도성 안에는 능묘가 없으며 사신이 묵는 관사(태평관)가 가깝다"는 의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 현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긴다. 오늘날 서울 성북구 정릉2동 산 87-16번지이다.



2개월 뒤 태종은 정릉의 초장지(철거지)에 있던 정자각을 옮겨다 태평관의 누각을 짓고, 돌은 기초석으로 쓰고, 봉분의 흔적도 없애버렸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장지는 천장 후에도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분을 남겨 두지만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


1410년 8월 8일 큰 비가 와서 청계천에서 백성들이 빠져 죽는 일이 벌어졌다. 의정부에서 흙으로 만든 광통교(廣通橋)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렇게 해서 석교(石橋) 광통교가 세워졌다. 최근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조선 최초의 병풍석과 영저·영탁을 확인할 수 있다. 다리 아래 음지에 가려져 있어서인지 아니면 태조가 자신의 수릉 조영에 최고의 돌만 골라 쓴 덕분인지 이보다 12년 후에 조영된 건원릉의 조각물과 비교해도 훨씬 잘 보존되어 있고 형상도 선명하다.


정릉을 성북동으로 옮긴 뒤 봄과 가을에 이품관을 보내 제례를 올렸는데 세종 조에는 조정에서 직접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족친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태종이 정릉을 파묘하여 사가 무덤으로 조성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다. 이때 옮겨진 사각 장명등과 고석은 조선시대 최초의 석물로 평가된다. 혼유석은 원래의 것을 반으로 잘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고석은 원래 5개였던 것을 2개만 가져다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양식을 따른 남한 유일 조선최초의 정릉 장명등


능침에 쓰였던 병풍석을 뒤집어 사용한 광통교 석축, 하단 우측에 영저와 영탁 조각이 보인다.



천장된 지 260년 후인 1669년 1월 4일 판부사 송시열은 현종에게 "정릉이 태조의 첫 부인의 능인데 태종의 어머니인 제릉(齊陵)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신덕왕후를 태묘에 재향하고 능도 다른 능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에서 송시열은 동성 간에 결혼금지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또한 '왕자의 난'이 정도전 등의 모함으로 일어났다고 전한다. 이후 송시열계 서인들이 집요하게 상소하여 결국 현종은 정릉의 보수를 명하고 재실을 중건하고, 수직수호를 둘 것을 명한다. 또한 송시열은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할 것을 천거하며 '계지술사(繼志述事)', 즉 자손이 번성하고 선함을 영원히 전하는 경사라며 선대가 좋게 평가하리라는 이유를 들어 상소하다. 이후 신덕왕후 강씨는 종묘에 태조의 계비로 추봉된다.


이처럼 신덕왕후의 복권은 송시열의 작품이었다. 종묘에 추봉되는 그날 성북동 정릉 일대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 하여 '세원지우(洗寃之雨: 원통함을 씻어준 비)'라 불렀다 한다.


정릉의 공간 구성은 일반적 능제가 직선축을 이루는 것에 비해 자연 지형에 맞춰 절 선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역 입구의 금천교에서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대표적 조형기술을 볼 수 있다. 정릉의 사각 장명등은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고려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상부의 주두가 사라져 원형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그 규모나 섬세하게 조각된 모습이 사랑하는 현비를 위해 태조가 공을 들여 조영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릉의 전경(일반적으로 봉분-장명등-정자각-홍살문이 직선으로 배치되나 정릉은 홍살문에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이창환의 '신의정원 조선왕릉' 둘러보기<br/> 518년간 이어 온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영혼의 공간에 대한 경관관과 능역의 조영관 그리고 그 시대의 각종 석물의 특징을 살펴보는 내용이다. 왕릉에는 그 시대의 통치철학과 조영사상, 생활상이 잘 반영된 공간이다. 조선왕릉이 갖는 경관관과 조영적 특성을 둘러보며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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