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가 아닌 군주로서 태조의 리더십을 ’결단과 승부의 리더십’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 어색한 면이 없지 않다. 왕비 신덕왕후 강씨가 병이 나자 승僧 50명을 내전까지 불러 불공을 드린 모습이나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요산으로, 함흥으로 회피한 모습은 적어도 일국의 국왕다운 결단과 승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밥상 위 고등어도 한 때는 푸른 대양을 제집 삼아 펄펄 뛰놀던 때가 있었는데, 하물며 500년 왕조를 일군 이 용이랴! 1392년 하늘로 승천하기 전 잠룡潛龍 때 태조의 모습에서 그 결단의 리더십을 읽는다.
능의 표본, 장수의 표본
건원릉의 주인 조선의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격언을 참말로 만든 고려의 장수이자 조선의 첫 왕이었다. 건원릉은 동구릉을 동서로 구분하는 기준이 되며, 조선 왕릉의 대표이자 표본이다.
건원릉 항공사진
태조의 건원릉은 조선왕릉의 표본이다. (사진 : 문화재청)
태조 역시 전장에서 장수의 표본이자 귀감이었다. 태조는 앞장섰던 장수였다. 전장에서 그는 멋진 술이 달린 지휘봉만 이리저리 휘두른 장수가 아니었다. 활을 메고 칼을 들고 싸움의 선봉에 선 리더였다. 전장에서 늘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무공에 대한 그의 강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태조의 활솜씨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완벽 그 자체였다. 창업 군주에 대한 실록 기자의 배려를 감안하더라도 태조의 무공, 특히 그의 활솜씨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딱 한 기사만 보고 가자.
태조가 일찍이 홍원(洪原)의 조포산(照浦山)에서 사냥을 하는데,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오는지라, 태조가 말을 달려 쏘아 먼저 한 마리의 노루를 쏘아 죽이니, 두 마리의 노루가 모두 달아나므로 또 이를 쏘니, 화살 한 개 쏜 것이 두 마리를 꿰뚫고 화살이 풀명자나무에 꽂혔다. 이원경(李原景)이 그 화살을 뽑아 가지고 이르니, 태조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더디게 오는가’하니 원경이 말하기를 ’화살이 나무에 깊이 꽂혀서 쉽사리 뽑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태조실록]1권 총서 53번째 기사
[태조실록] 총서에는 태조의 무공과 활솜씨에 관한 이 같은 일화만 30 여개에 이른다.
배경보다 실력
태조는 사람을 쓸 때 배경이나 출신보다 실력을 중시한 리더였다. 봉화-영주 출신으로 그 포부와 능력은 출중했으나 서얼출신의 노비였던 외할머니 때문에 출세의 발목을 잡혔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을 자신의 **장자방(주석)으로 삼은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1384년 동북면으로 태조를 먼저 찾아간 정도전은 본인이 이성계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역죄에 해당하는 실언이다. 훗날 정도전은 그 실언의 대가를 죽음으로써 지불하게 된다. (1차 왕자의 난*)
정도전 영정
태조의 핵심 참모이자 브레인으로서 역성혁명을
주도했던 정도전
태조와 정도전의 관계나 우열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태조가 배경보다 실력에 무게를 두고 인재를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시 오랑캐로 천대하던 여진족 출신 ’퉁두란’(이두란, 후에 이지란李之蘭 1331~1402)과 의형제를 맺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기야 어찌 보면 태조 자신도 고려의 변방 동북면(함흥지방) 출신이고, 실력 하나로 그 곳까지 오른 사람 아니던가.
무인으로서 이성계는 최고였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그러나 국왕으로서 태조는 장수 이성계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선 창업 이후 건국 세력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 때문이었다. 또한 태조는 권모와 술수에 능했던 냉혹한 리더이기 보다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인재를 곁에 두고 그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인간적인 리더였다. 하지만 최후의 결단과 실행은 태조 자신의 몫이었다. 혁명의 시작 위화도 회군은 바로 리더로서 태조에게 가장 큰 결단과 승부가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불가하옵니다!’
1388년(우왕 14) 2월 명明은 고려 사신을 통해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명의 요동에 귀속한다’고 통보해 왔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우왕(禑王 고려 제 32대 왕 1365~1389, 재위 1374∼1388)과 당시 최대의 실권자였던 최영(崔瑩 1316~1388)은 요동을 치기로 결정하고 태조를 불러 요동정벌에 힘을 다할 것을 명한다. 이에 태조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에 반대한다. 그 유명한 4대불가론이다.
-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 네 가지 불가한 것이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슬리는 것이 첫 번째 불가한 것이요,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요, 온 나라가 멀리 정벌을 하면 왜적이 빈틈을 타서 침입할 것이니 세 번째 불가한 것이요, 때가 무덥고 비가 오는 시기라서 활에 아교가 녹아 풀어지는 것과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이 네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
당시의 정세는 고려가 명나라의 요동을 차지할 수 있던 좋은 기회이기는 했다. 최영은 ’요동의 군사가 오랑캐를 치기 위해 성을 비웠다’는 첩보를 이미 입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기회였던 만큼 현실적으로 잴 것도 많았다. 이성계는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장수였다. 정벌의 명분은 있을지 모르지만, 국제정세와 전쟁여건이 불리하다는 점을 4대불가론을 통해 정확하게 지적해 냈다. 또한 정벌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가을에 군량과 보급이 확보된 후에는 정벌이 가능하다’는 타협안도 제시했다. 태조의 ’4대불가론’은 그 첫째 이유가 분명 사대적이나, 당시의 상황에서 봤을 때 대체로 타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성 몇 개를 얻었다하더라도 얼마가지 않아 요동을 잃은 명과 큰 전쟁을 치러야할 터, 외교적 부담은 물론 백성들의 큰 피해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고, 조민수(曺敏修 ?~1390)를 좌군도통사로 태조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군사는 모두 3만 8천 8백 30명이었다. 4월 18일 요동정벌군은 평양을 나섰으며,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잔류하였다.
최영 장군 무속화
한을 남기고 죽은 최영 장군은 무속신앙의 숭배대상
이 되었다. (사진 : 인왕산 국사당 소장, 조선 후기 제작)
최영 장군 기념우표
북한에서 발행한 최영 장군 기념우표
평양을 떠난 지 19일째 되는 5월 7일, 정벌군은 결단의 장소 압록강 위화도에 진을 쳤다. 그러나 도망하는 군사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마침 비가 내려 여울에서 강물에 휩쓸린 자가 수백 명이었다. 위화도에서 요동성 사이 건너야할 큰 내川도 많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태조의 우려대로 날은 무덥고 장마가 져 활이 풀렸고, 갑옷은 무거워 군사와 말이 지쳐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성에 다다라 성을 공략해도 성을 빼앗지 못하리라’ 태조는 생각했다. 또한 군량과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여 섬 가운데에 머무르게 된다면 군량을 허비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태조는 이러한 현장상황을 조목조목 기록해 보고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진군을 독촉할 뿐이었다. 군사들은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태조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면(태조의 고향)으로 향하려고 이미 말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았고, 정벌군의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이 소문을 듣고 황급히 태조에게 달려가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며 눈물을 흘렸다. 정벌군의 최고 지휘관이 저 정도였으니 군사들의 사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말머리를 돌리다
1388년 5월 22일, 드디어 태조는 여러 장수 앞에서 회군의 선언했다. 위화도에 주둔한지 15일 만, 평양을 떠난 지 33일 만이다.
- ’(전략) 내가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이 또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어찌 그대들과 함께 들어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최영)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히 하지 않으랴’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
위화도 회군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은 정벌을 떠난 지 33일 만에 압
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말머리는 요동에서 개경으로 향하게 됐다. 압록강을 되돌아 건널 때, 태조는 백마를 타고 붉은활(동궁)과 백우전(白羽箭 하얀 새의 깃으로 살깃을 단 화살)을 메고 강 건너 언덕에서 군사가 모두 강을 건너는 것을 지켜보았다. 완전히 영화의 한 장면이다. 회군을 결심한 이상 신속하게 개경으로 진군해야 했다. 그러나 태조는 ’빨리 가면 반드시 (아군과)싸울 터이니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된다’며 진군 속도를 조절했고, 우왕의 신변과 백성에게 미칠 작은 민폐까지 걱정하는 여유를 보였다. 이는 이미 자신 쪽으로 기울어진 전세를 읽은 태조의 자신감인지, 아니면 정말로 고려군과 우왕, 백성들의 민생과 안위를 걱정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회군의 명분은 이미 쌓았으니 그 실행에 덕을 쌓기 위함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회군의 무리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개경에 입성했다. 그리고 피를 보지 않고 권력의 핵 최영을 체포해 고봉현으로 귀양 보냈다.
이로써 위화도에서 내린 태조의 결단과 승부는 태조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회군을 함으로 명과의 일전을 피해 갈 수 있었고, 백성들의 피해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는 명과의 사대외교 틀 안에 갇히게 되었고, 260 여년 뒤 명이 망한 후에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느라 엄청난 피해를 본 것 또한 명확한 사실이다. 무엇이 더 크고 중하며, 어떤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이었을까. 회군 당시 이미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노래가 군사와 백성 사이에서 불리고 있었다. 500년 조선 왕조는 그렇게 움트고 있었다.
여행, 특히 답사는 ’때’가 중요하다. 건원릉 산책은 어느 때 가는 것이 좋을까? 녹음 짙은 오뉴월이나, 가을색 깊은 만추 때 보다는 그 잎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 사이로 삭풍 몰아치거나 흰 눈 내리는 한겨울 아니면, 이제 막 새싹이 돋아나는 봄의 문턱이 좋을 듯싶다. 또 해질 무렵 보다는 여명이 트는 새벽 무렵이나 이른 아침나절이 조금이나마 태조의 인생 여정과 어울리는 산책 타이밍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건원릉의 설경
(사진 : 문화재청)
주註
왕자의 난* : 조선 개국 이후 건국 세력 간에 발생한 권력 투쟁으로 1차 왕자의 난(1398년, 태조7)은 태조의 5남 방원(조선 제 3대 왕 태종)이 정도전, 남은 등 재상중심의 왕도정치 세력을 제거하고,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살해한 사건이다. 2차 왕자의 난(1400년, 정종2)은 1차 왕자의 난 이후 방원의 넷째 형 방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박포의 충동으로 일으켰으나 방원에게 제압된 사건이다.
장자방** (장량 張良 ?~BC 168) : 한나라의 고조 유방劉邦의 책사로서 뛰어난 책략으로 한나라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
목자득국(木子得國)*** : ’목木 +자子, 즉 이씨李氏가 나라를 얻는다.
글 사진 = 이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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