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새벽 김좌진과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의해 실시된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22일 천수평전투와 이랑촌전투, 23일 맹개골전투와 만기구전투, 20일 홍범도 부대가 치룬 완루구 전투, 그리고 25일부터 26일까지 실시된 고동하곡전투까지 6일간 6번의 전투를 포함한 전투들을 통칭하는 전투이다. 독립군 투사들은 적에게 쫓기는 불리한 입장에서 일본 정규군을 매복과 기습, 습격 등의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대승리를 달성한 승리였다.
당시 청산리전투의 대승리는 일본의 핍박아래 고통받던 조선국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큰 기쁨과 광복에의 의지를 심어준 대승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일대에서는 일본군의 보복에 이해 수많은 동포들이 사살되고 피해를 입는 경신참변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청산리전투 전적비는 화룡에서 비포장길을 30분 이상 달려 조선족 마을을 지난 언덕위에 설치되어 있다. 5년전에 올 때는 길을 잘 몰라서 상당히 헤멘 기억이 있고 비포장을 한참이나 달려서 시골을 지나 찾았고, 이곳이 당시 조선 독립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너무 눈물이 나고 감개무량했던 기억이 있다.
이곳을 올 때면 다시한번 대단하였던 전투였음을 생각하게 된다. 아주 불리한 입장에서 그와같은 대타격을 일본군에게 입힐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승리가 아닐 수 없고, 우리 조선독립군들이 대담하고 적극적이었으며 온 몸을 던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전적비 입구에서 내려 대열을 갖추고 전적비로 올라 행사를 했다.
태극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묵념을 하고 헌화를 했다. 광복청년의 노래를 부르고 만세삼창을 하고 그리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주변 청소를 하였다. 그리고 당시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전적비를 바라보며 힘차게 애국가를 부르고 광복청년의 노래를 불렀다.

유무정 이사가 나와서 광복청년의 노래를 선창하고 있다.

전대열 위원장이 나와서 만세삼창을 힘차게 불렀다. 대한민국 만세, 조국통일 만세, 청산리전투 만세, 아 그 함성 그 감격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모두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전적비를 감싸고 만세를 다시한번 불렀다. 우리 답사요원들의 정성이 독립투사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 만주 답사의 하이라이트였다.
1910년 을사늑약에 의해 나라가 빼앗기고 1919년 3.1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이 불길처럼 일어날 때 만주에서는 이제 광복을 위해서는 무장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방침에 의해 대대적인 무장투쟁이 개시되었다. 그리하자 일본은 이러한 조선인에 의한 무장 투쟁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서 만주 독립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나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9사단 병력과 20사단의 1개 대대병력, 그리고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사단의 일부 병력 등 2만 여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자
만주 일대이 독립군들은 기지를 버리고 백두산 자락으로 이동하게 된다.
독립군이 쫓기고 일본군이 추격하는 상황에서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를 달성한 것이다. 이 청산리전투이후로 조선 독립군들은 모두 러시아지역으로 이동한다. 만주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그리고 만주 지역의 조선 동포들은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받게 되는 경신참변을 겪게 된다. 약 10만명 이상의 동포들이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30년대까지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탄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만주국이 생기면서 만주일대에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