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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서울 동묘 옆 벼룩시장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춘원 이광수의 수필집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8.24]



서울 동묘 옆 벼룩시장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춘원 이광수의


수필집

글 | 엄상익 변호사

▲ 춘원 李光洙. / photo by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광화문에서 볼일이 있을 때면 나는 일이 끝난 후 청계천을 산책하곤 한다. 종착지는 동묘 옆 벼룩시장의 헌책방이다. 그날도 헌책방 앞 좌판에는 쓰레기더미 같이 쌓아놓은 천원짜리 책들이 있었다. 헌책방에서도 제일 천대받는 코너에는 더러 오래 전 죽은 사람들의 보물 같은 수필집들이 끼어 있었다. 헌책방의 더러운 바닥에서 종이가 누렇게 변색된 사도법관(使徒法官) 김홍섭(金洪燮)을 만나기도 하고 시인 노천명(盧天命)을 보기도 했다. 세상을 살아간 선인들의 진솔한 삶이 그 속에 있었다. 때가 타 누렇게 바랜 ‘인생의 향기’라는 책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 하며 나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광수(李光洙)의 수필집이었다. 일제시대 동아일보에 매일 올리는 그의 연재소설은 전(全)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면서 잠에서 깨웠다. 그는 조선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의 수필집을 천원을 주고 샀다. 수필집 중에 그의 열한 살 아이시절 유년의 이런 기억이 담겨 있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콜레라로 죽었다. 어린 누이동생과 나만 남았다. 이웃사람들은 집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전염병이 옮을까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살아야 했다. 밥을 지어 동생을 먹여야 했다. 땔나무가 필요했다. 낫을 들고 나섰다. 아직 싸늘한 바람이 부는 사월이었다. 누렇게 시든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서툰 솜씨로 불이 붙을 풀들을 베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마른 풀을 베다가 낫이 나무뿌리를 건드리고 미끄러지면서 왼손 무명지를 치고 지나갔다. 순간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올라 낫을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아 “어머니” 하며 엉엉 울었다. 서러웠다. 피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한참 후 나는 눈물을 닦고 풀단을 메고 언덕을 내려갔다. 집에서는 누이동생이 문 밖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물을 길어오고 메고 온 마른 풀과 나뭇가지로 부엌에서 밥을 지어 부뚜막에서 동생과 밥을 먹었다.>
  
  흙수저 출신이 시작부터 파란만장했다. 소년은 어린 동생을 아는 친척에게 강제로 주고 동학군 접장 집에 들어가 전령노릇을 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어린아이면 경찰에서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능은 금수저인 것 같았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중학교에 진학했다. 방학 때 귀국하면 당장 입에 들어갈 밥이 없었다. 이빨이 다 빠진 할아버지가 삶은 보리를 물에 말아 억센 열무김치를 반찬으로 먹고 있었다. 일본어를 배운 그는 헌병대 사무실에 나가 아르바이트로 공문서를 써주고 몇 푼의 돈을 받는 모습이었다.
  
  그가 사는 세상은 춥고 힘이 들었다. 당시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진 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동경에서 독립선언서를 쓰기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가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귀국하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됐다. 그는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이란 글을 써서 조선민족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일합병이 되고 한 세대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득한 조선의 왕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초라한 임시정부는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분열되어 노선투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점점 강해져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 경제대국 반열로 가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 이렇게 된 바에야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 낙후된 3등국 조선에서 벗어나 합병된 일본의 일등시민이 되자고 했다. 사람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에게 친일파(親日派)라는 낙인을 찍은 후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그는 영원한 민족반역자가 되고 말았다. 해방이 되고 그는 세상에 대해 “나 자신이 악취 나는 추물인 것을 잘 압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친일반민족위원회에 체포되어 갔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의 딸도 할머니가 된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할 당시 미국의 이광수 후손이 인편을 통해 소송의사를 내게 전했다가 철회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주의자들이 더러 오해받고 회색분자로 매도되는 경우도 있다. 정치학 교수들의 대부인 김상협(金相浹) 고려대 총장은 해방 무렵 세계정세는 미소(美蘇)의 냉전체제에서 세계 어느 나라든지 미국 아니면 소련 둘 중의 하나 쪽으로 줄을 서야 하는 현실이었다고 했다. 김구(金九) 선생이 주장하듯 남북이 한 민족으로 통일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理想)이지 현실은 아니라고 했다. 영리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쪽으로 줄을 서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고 했다. 김상협 교수가 총리가 되고 나중에 체코의 대통령을 만났을 때 체코 대통령은 너희는 애초에 줄을 잘 섰다고 부러워하더라고 했다. 이제는 이념의 잣대로 현실을 보지 말고 현실을 통해 이념을 형성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원문보기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3&nNewsNumb=20170825858&nidx=2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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