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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같음이 만든 다름...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외 -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9.11]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드는 가죽신 -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 화혜장 ⓒ문화재청
우리의 전통신은 한 켤레를 만드는 데만 70가지가 넘는 공정을 거쳐야 하므로 최소 사흘에서 열흘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도의 기술과 숙련된 솜씨가 있어야만 완성할 수 있는 하나의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전통신의 밑창 재료인 소가죽은 짚불에 사흘 동안 쏘이고, 갈색이 배어 나올 때까지 이틀 동안 말려야 하는 수고로움을 견뎌 내야 한다. 신발을 신는 이와 용도에 따라 가죽을 재단하고 손으로 한 땀 한 땀 꿰매야만 한 짝의 신을 완성할 수 있다. 사대부 여인들의 당혜와 운혜, 남성들이 평상복에 신는 태사혜 등 다양한 신발에는 어김없이 튼튼한 소가죽이 쓰였다.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화혜(靴匠)장은 신발을 만드는 장인으로, 우리말로는 갖바치라 불렀다. 갖바치는 단어 그대로 가죽신을 만드는 일을 하던 사람을 일컫는다. 『경국대전』에는 중앙관청에 속한 화장만 16명, 혜장은 14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목(장화의 발목이 닿는 윗부분)이 있는 신발인 화(靴: 관료가 조정에 나갈 때 신는 신)를 제작하는 ‘화장’과 신목이 없는 신발인 혜(鞋: 반가의 남녀가 일상에서 신는 신)를 제작하는 ‘혜장’으로 나눠 전문적으로 신발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양반을 상징했던 가죽신은 고무신과 구두가 나타나면서 어느새 그 자취를 감췄다. 한 켤레의 신발로 전통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갖바치의 가치가 다시금 우리의 생활 속에서 빛나기를 기대해본다.



물고기 가죽으로 감싼 정교한 불교 공예 -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24호 범어사목제어피인통 ⓒ범어사 성보박물관
조선 후기 불교 공예품인 범어사목제어피인통은 도장을 담아두던 통이다.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방형의 몸체와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 지붕 형태의 뚜껑으로 이뤄져 있다. 기본 골격은 나무로 되어 있으며 표면은 어피(魚皮), 즉 물고기 가죽으로 감싸고 있다. 비록 어피가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모서리마다 황동 장석으로 마감을 해 세련되면서도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장석에는 덩굴 무늬의 당초문이 새겨져 있으며 정면에는 ‘신인(信印)’이라는 두 글자가 부착되어 있다. 좌우 측면에는 활 모양의 손잡이와 바로 아래쪽에 ‘ㄷ’자형 손잡이가 달려 있고 후면에는 경첩 2개가 있다. 뚜껑의 꼭지에는 꽃잎모양의 판을 끼운 후 13각으로 멋을 낸 손잡이로 장식했다. 불교 공예품의 진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어피는 공예품을 만들 때나 옷을 지을 때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멋과 실용을 갖춘 재료였다. 또한 도검류의 손잡이에도 사용돼 서늘하면서도 미끄러지지 않는 쾌적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부분 까칠까칠한 상어와 가오리의 뱃가죽을 사용했으며 작은 원형의 무늬는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켰다.
화려한 재질 때문에 어피는 조선 후기 사치품 중 하나인 안경집이나 범어사목제어피인통과 같은 도장집, 고급 물품의 외장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누구나 흔하게 쓸 수 있는 가죽은 아니었던 셈이다.



화려하고 위풍 당당한 조선시대 투구 -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80호 가죽 투구와 갑옷 어깨장식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전사의 생명을 보호하는 갑옷과 투구는 시대별로 다양하게 진화해 왔다. 그중에서도 전쟁에서 방어를 목적으로 썼던 투구는 기능적인 면 외에도 화려한 장식을 보여줌으로써 전사의 위상을 상징하는 무구였다. 철뿐만 아니라 가죽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로 제작된 투구는 모양과 색깔로 지위와 계급이 결정되기도 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된 ‘가죽 투구와 갑옷 어깨장식’은 현재 국내에 몇 점 남지 않은 조선시대 원수명 투구와 갑옷 부속구이다. 이 문화재의 구조와 의례용 기물 장식 등에서 당시의 투구 제작기법을 파악할 수 있어 큰 의의를 지닌 유물이라 할 수 있다.
가죽으로 제작된 투구는 이마 가리개에 상당관의 관직을 의미하는 ‘원수(元帥)’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제작 시기는 18세기 말~19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투구의 대부분이 쇠로 만들어진 것에 반해 가죽이란 점에 있어서 희소가치가 높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장식이다. 보주와 삼지창으로 정수리를 장식한 것은 물론 청룡·백호주작·현무 등의 사신문과 용봉문 등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형태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밝히는 조선시대 투구와도 일치한다. ‘투구 꼭대기의 삼지창, 중기부터 투구 앞면에 용봉문과 당초문 등을 새긴 점, 그리고 뒤에는 귀와 목을 가리는 드림을 달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때가 탈수록 멋을 더하다 - 가죽을 활용한 생활 용품 ⓒ국립민속박물관
동물에게서 얻을 수 있는 원시적인 재료인 가죽은 전통 악기인 북이나 전쟁 무구 외에도 공예품으로 고급스러움을 선보여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죽 생활 용품은 조선시대부터 광복 이후까지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다. 그것이 포유류의 가죽일 때는 튼튼하고 보온성이 필요한 가방이나 신발에 사용한 반면, 물고기 가죽의 경우는 화려함을 강조해야 할 안경집이나 보석함 등의 고급스러운 물건에 사용됐다.
쇠보다는 가볍고 천보다는 내구성이 좋은 가죽을 사용한 생활 용품 중에는 현재 그 자취를 볼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가령 조선시대에 붓과 같은 필기구를 보관하고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필갑은 나무로 직사각형의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표면을 싸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당시, 옷이나 물건을 담는 모든 함은 이와 유사한 모양을 했다. 그 외에도 군대를 움직일 때 증표로 삼았던 병부를 넣는 주머니 역시 전체가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광복 이후 이발소에서 흔하게 보던 가죽 숫돌도 지금의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의 물건이다. 면도칼의 날을 세우는 데 쓰였던 가죽띠는 천과 가죽띠가 금속으로 연결되어 있고 고리가 매달려 있다. 시간을 오래 두고 사용할수록 부드러운 결과 고풍스러운 멋을 내는 가죽. 그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물건들 속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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