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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1920년대 세워진 자랑스러운 우리 건축물 등록문화재 제4호 대구 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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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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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tv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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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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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제4호 대구 효목동 조양회관 2,689m의 아름다운 돌담길 대구에는 경상감영이 있어 영남(嶺南)의 으뜸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경상감영은 조선 지방 행정의 8도제 하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이다. 현대의 도청과 같은 역할을 한 곳이다. 옛 경상 감영은 오늘날 영남이라 부르는 경상도 대구, 부산, 창원 등을 아우르고 있었다. 따라서 1800년대에는 영남의 감영을 줄여 영영(嶺營)이라고도 불렀다. 대구의 또 하나 상징적 장소는 시장(市場)이었다. 대구 시장은 강경, 평양 시장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이었다. 여기서 대구 시장은 서문(西門)시장을 말하는 것이다. 대구는 성벽 도시여서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그 문 중에서 으뜸은 서문이다. 서문 문밖, ‘앞밖거리’에는 때마다 장이 섰는데 서문시장이 규모가 가장 컸다. 봇짐장수 즉, 보부상은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성돌담을 끼고 활동했다. 대구도 역시 남문이 정문으로 영남문 혹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고 불렀다. 경부선 공사 중 대구 지역의 공사는 1904년 여름에 절정을 이뤘다. 대구 군수 박중양은 통감부의 지시로 1906년 대구읍성을 철거했다(1906.10~1907.4). 대구읍성은 1736년 만들어진 2,689m의 아름다운 타원형 돌담이었다. 성과 문루 등 제반 시설이 모두 파괴되고 성 안팎의 의미는 사라졌는데, 하루 속히 돌담길과 문루 등은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우국의 뜻, 건축물에 담다 당시 대구 인구는 4만 정도였는데 이미 일본인이 1만 명을 넘고 있었다. 서상일(徐相日, 1887~1962)은 대구역 역전 부근에 있던 곡물취인소(穀物取引所) 소원이었다. 당시 대구에서 능력 있는 조선인들의 사업 무대는 곡물취인소였는데, 이후 미곡취인소로 바뀌었다. 대구 미곡취인소는 군산 것과 함께 큰 거래장이었다. 서상일은 태궁상회(太弓商會)를 열어 미곡 무역을 했다. 부산의 백산상회(白山商會) 등과 맥을 함께 하며, 박상진(1884~1921)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에 많은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서상일은 ‘아침해가 비추는 곳’이라는 뜻의 조양회관(朝陽會館)을 지어 대구 지역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대구의 우리 건축·건설회사는 당시 영세했고, 서양인에 의한 건축물이 조금씩 들어서고 있는 정도였다. 일본인들에 의한 본격적인 회사는 1930년대부터였다. 조양회관은 1922년 4월 달성공원 입구 신정(新町)의 약 500평 대지에 착공했는데, 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후 중구 대신동 5번지(달성동 5-2)로 지번이 바뀌었다. 조양회관의 설계자는 조선인 윤학기였다. 조양회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580.8㎡(170여 평)으로 지어졌다가 이후 증축되어 연면적 837.1㎡로 확장됐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강당으로 쓰였다. 가운데 포치(출입구)와 작은 박공을 두고, 양쪽 끝은 계단실로 돌출시켰다. 지붕에 전면 굴뚝 2개, 후면 굴뚝 2개가 대칭미를 강조했다. 도머(지붕 둥근 창)는 6개로 안정적인 입면이다. 조적조 건축물의 주재료인 벽돌은 백남채(白南採)의 공장에서 만든 것인데 그가 공사감독을 겸했다.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참여했고 목재는 압록강 낙엽송을 썼으며, 건물은 같은 해 10월 30일 준공됐다. 건물에는 동아일보 대구 지국이 들어왔고, 1923년 7월 대구구락부가 조직되기도 했다. 신간회(1927.9)와 근우회(1928.2) 대구지회의 창립대회도 열렸다. 2층에서는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도 열렸는데 최남선, 윤백남 등이 강의했다고 한다. 일제는 1929년이 건물을 문 닫게 하고 대구부립도서관으로 사용하였으며, 1941년에는 일본군 보급부대로 썼다.
교육시설로 인연 이어 해방이 되며 조양회관은 1950년 이후 원화여중·고 교사가 되었다. 1955년 1월 14일 재단법인 조양회관이 설립 인가되며, 초대법인 이사장에 서상일이 취임했다. 1980년 월성산업에서 조양회관을 인수, 1981년 학교를 성당동 644번지로 이전하며 조양회관은 폐쇄되었다. 그렇게 조양회관은 1982년 11월 대구시에 기증됐다가 1984년 6월 현 위치로 옮겨간 후, 그 자리에는 달성빌딩이 들어섰다. 건축물은 제자리에 두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그 차선이 이전해 수명을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이 복원. 제자리에 원자재를 보관해 두었다가 다시 쓰는 형식이다. 물론 철거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조양회관은 불가피하게 제자리를 떠난 것이다. 1984년 6월 월성건설이 지금의 자리(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로 2길 94)로 이축하게 되었고 현재 사회교육시설로 이용되고 있으며, 1987년부터는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이 회원인 광복회가 들어서 건립 취지를 이어가고 있다. 1층 독립운동전시실에선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 우리나라 대표 애국지사들에 대한 기록과 이상룡, 장지연 선생 등 영남 출신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또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연표를 비롯해 대구 경북 항일운동사도 한눈에 알 수 있게 정리해 두었다. 문화재청에서는 등록문화재 제도를 만들고 첫 등록대상에 조양회관을 넣었는데, 2002년 2월 28일이었다. 서울을 포함해 10건이 대상이었는데, 서울에 3건이 등록된 후 조양회관이 제4호로 등록되었다. 등록문화재 제도 첫 기에 등록된 것으로 의미가 크며, 철거가 능사인 1970~80년대에 이축했다는 점을 높이 사 등록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아쉬웠던 점은 본래 도면과 자료들이 소재 불명이었던 점이다. 조양회관은 대구시에서 문화재법 제한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이축한 건물이다. 이제라도 하루속히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
글‧김정동(우리근대건축연구소) 사진‧문화재청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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