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 위의 머릿돌에는 용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 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문화재청)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 신라 29대 임금 태조 무열왕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장남 용수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장녀 즉 선덕여왕의 언니 천명 공주 소생이다. 아버지 용수가 죽은 후에는 어머니가 삼촌인 용춘에게 재가하였기에 용춘의 양자가 되었고 24살에는 화랑도의 제18세 풍월주에 올랐으며 이후 26, 27, 28대 진평, 선덕(여), 진덕(여)왕대의 정치 외교 문제에 중추적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자 갔다가 갇히게 되었으나 겨우 탈출하였으며 이후 친당정책을 주도하여 여러 차례 당을 내왕하며 당 태종 이세민에게 병력지원을 약조 받았다. 이후 가야국 후예 김유신 등과 손잡고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신하들의 지지를 얻어 52세의 나이로 29대 임금이 되니 첫 진골 출신 왕이다.
이후 김유신과 힘을 합쳐 삼국을 통일하는 초석을 닦게 되나 완전한 통일을 못 보고 661년 6월에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사후 시호를 무열이라 하였으며 태종이라는 시호가 추가되어 태종무열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김유신의 누이 중 동생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하여 문명부인이 되었으며 언니 보희는 김춘추의 첩이 되었다. 30대 문무왕은 문명부인의 큰아들, 김인문은 차남이다. 또한 보희의 딸 요석공주는 김흠운과 결혼하였으나 백제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과부가 되어 원효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는 등(원효대사가 무열왕의 사위인 셈) 여러 가지 일화가 얽혀있는 것이 특징이다.
태종무열왕릉
태종 무열왕릉은 경주 북서쪽,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경주 IC 가까운 곳 선도산의 남쪽 기슭 아래에 있는데, 신라 56대 왕릉 중 어디가 누구의 왕릉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 드물지만 태종 무열왕릉은 그 앞에 무열왕릉비(碑)가 서있어 확실하게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능인 것을 알 수 있다. (사적 제20호)
이수는 양쪽에 세 마리씩, 좌우 합하여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여의주를 희롱하며 받들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뛰어난 조각이다. 귀부는 거북이가 머리를 높이 쳐들고 힘차게 앞으로 나가려는 형상으로 보이며 실제로 앞발은 5개, 뒷발은 4개를 조각하여 뒷발을 힘 있게 땅을 박차고 미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