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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420년 만에 귀환...익선관
글쓴이 tntv 등록일 [2013.03.13]

420년 만에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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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보기]http://news.kbs.co.kr/news/UserCategory.do?SEARCH_SECTION=XXXX&SEARCH_CATEGORY=NC0027&SEARCH_BROAD_CODE=0027

대구시 현풍면에 흐르는 낙동강.

이 지역의 낙동강엔 쌍산강이라는 옛 이름이 전해집니다.

<녹취> 이현근(前 달성군 의원) : "쌍산이라는 지명을 썼고요. 쌍산 비럭 끝이라고 그랬죠. 비럭이라는 게 뭐냐면 사투리로 절벽, 낭떠러지 같은 건데 저쪽에 보시다시피 절벽이잖아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선 의병장 김면이 이끈 의병이 왜적을 물리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개산포 대첩'입니다.

의병장 정경운은 '고대일록'에 이때 의병들의 활약상을 묘사했습니다.

6월 9일 묘시에 적선이 현풍 쌍산강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쏜 화살에 맞지 않은 적이 없었기에 적이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시 왜군이 한양의 궁궐 등에서 약탈한 수많은 귀중품을 배에 실어 가는 장면도 묘사돼 있습니다.

어휘잠과 후빈의 화관, 의금 및 서울의 판적, 사가의 보장이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최근 일본에서 국내로 들어온 익선관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약탈했던 수많은 유물 가운데 하나로 추정됩니다.

<녹취> 이상규(경북대 교수) : "최근에 공개된 익선관도 (1592년) 바로 6월 20일 바로 이 지역을 통과하는 왜적선에 의해서 일괄 약탈된 유물 중에 하나라고 추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420여년 만에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온 조선의 익선관.

일본은 과연 얼마나 많은 조선의 유물을 약탈해간 것일까?

<앵커 멘트>

익선관 뿐 아니라 조선 전기의 궁중 유물은 좀처럼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수많은 궁중 유물들이 임진왜란 전후에 약탈 또는 소실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임진왜란 전의 문화재들이 잇따라 국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문화재 약탈과 환수를 둘러싼 논란을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조선시대 왕은 정무를 볼 때 붉은 곤룡포를 입었습니다.

이 곤룡포에 받쳐 머리에 썼던 것이 익선관입니다.

공식 의례나 일상 업무는 물론, 궁궐 연회에서까지 왕이 재위하면서 가장 오랜 시간 썼던 관입니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익선관 유물은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아온 익선관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세종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만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세종의 익선관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만원권의 익선관에는 매미 날개 모양의 작은 뿔 두 개가 위쪽에 달려있지만, 이 유물엔 없습니다.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삼각 장식 13개가 달려 있습니다.

조선의 왕들 가운데 이 익선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이번에 공개된 익선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이 4개의 발톱을 갖고 있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중국 명나라는 세종 26년인 1444년 3월 용의 발톱이 5개인 의복 3벌을 하사합니다.

때문에 발톱이 4개인 용이 새겨진 이 익선관은 1444년 이전에 만들어져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론, 모란 꽃과 넝쿨 문양.

이 문양은 태종과 세종 때 많이 나타나는 문양으로 세종 이후엔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갖은 문자 문양은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놀랍게도, 익선관 안쪽에서 문서가 발견됩니다.

한글 자음이 적혀있는 이 문서는 유물 입수 당시에는 몰랐지만 국내에 들여와 조사하는 과정에서 내시경 촬영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 훈민정음 관련 문서를 자신의 익선관 안에 넣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습니다.

<인터뷰> 이상규(경북대 교수) : "머릿속에 관 안에 넣어서 가신들에게 세종이 추진하는 한글 창제에 대한 의지를 실어 담았지 않겠는가."

연구팀은 이 문서를 훈민정음의 제작을 풀이한 제자해로 보고 있습니다.

한글 창제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 해례본의 안내서라는 것입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이전의 관련 자료는 전무한 상황.

연구팀은 이 문서가 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익선관 내부를 해체하고 정밀한 조사를 통해 다가오는 한글날을 전후로 결과를 발표할 계획입니다.

<인터뷰> 박상진(경북대 교수) : "훈민정음 해례본 그것도 붙어있다니까 떼어내야되는 그런 작업을 할 때 표본 채집을 해서 연대 분석을 하면 대체적인 연대가 나올 거라고 봅니다."

취재파일팀은 신원 노출을 꺼리던, 익선관 소장자를 어렵게 만났습니다.

이 소장자는 일본 교토에 있는 일본인 지인으로부터 익선관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녹취> 익선관 소장자(음성변조) : "이걸 찾아와야되겠다 하는 욕심으로 그분한테 적극성을 띄었죠. 제주도 놀러오시면 골프도 제가 안내를 하고...노력 끝에 결국, 일본인 소장자의 마음을 연 셈입니다."

<녹취> 익선관 소장자 (음성변조) : "(일본인이) 제주도에서 갈 때쯤 돼가지고 유물이 어떤 것이 필요하냐고 한국에 필요하냐고 묻더라고요. 어떤 것부터 갖고 와야되겠는가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소장자는 익선관 외에도 역사적인 가치가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요 궁중 유물들을 더 사들여 왔다고 말합니다.

<녹취> 익선관 소장자(음성변조) : "다 왕과 관련된 겁니다. 직접적인 왕과 관련된 겁니다."

일본인 소장자는 집안 대대로 익선관 등 조선의 유물들을 보관해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녹취> 익선관 소장자(음성변조) : "유물들이 다 임진왜란 이전의 유물이더라고요. 전부 다 이전의 유물이고 궁중 유물이 몇 점이 보이더라고요."

일본강점기 우리 유물이 대량으로 약탈되기 전 왜적과 왜구 등이 약탈해간 유물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10월, 일본 대마도에서 불상 2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는 사찰에서, 다른 하나는 신사에서였습니다.

알고보니, 두 불상은 우리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동조여래입상과 관음보살상.

이 불상을 훔친 이들은 국내 문화재 전문 털이범들이었습니다.

7세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서산 부석사.

전문털이범들이 일본에서 훔쳐온 관음보살상이 원래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에는 천력 3년인 1330년, 고려 서주 부석사에서 만들었다고 씌어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음보살상이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구가 서해안에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에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인터뷰> 원우(서산 부석사 총무스님) : "1370년에 이쪽에 왜구가 극심하게 출몰했고 내륙지역인 논산의 개태사까지 침범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약탈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법원은 최근 부석사 측이 낸 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법원은 불상을 소장했던 일본 관음사가 불상을 정당하게 취득했다는 사실이 입증될 때까지 불상을 반환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사회 단체는 관음 보살상을 이곳 부석사에 다시 봉안하기 위한 주민 협의회를 최근에 구성했습니다.

관음 보살상의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터뷰> 우종재(서산시의회 의원) : "내 고향의 국보급을 일본 사람들이 강탈해간 부분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야 되겠다 이런 설명하면서 그때부터 서명 운동을 시작했고..."

결국, 일본 관방장관이 불상 반환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양국의 외교 문제로 까지 번졌습니다.

<녹취> 스가 요시히데(일본 관방장관) : "국제법에 따라 문화재 반환 요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교 경로를 통해서 반환을 요청할 겁니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가입한 유네스코 관련 협약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따라 불상의 반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이강열(서산시 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 : "복잡하게 얽혀 있고요. 이게 어떻게 보면 문화재 환수, 제자리 찾기 운동 이런 것의 연속선상일 수도 있고...쉽지 않은 내용들이 얽혀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전기 회화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일본 텐리 대학에서 원본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안견의 출신 지역인 서산 주민들은 최근 관음보살상 반환에 더해 몽유도원도의 반환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약탈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현재 국외에 떠도는 우리 문화재는 일본 6만여 점 등 확인된 것만 15만여 점.

이 가운데 현재까지 국내로 환수한 문화재는 9천여 점에 불과합니다.

<인터뷰> 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 "고려청자가 단절이 된 것은 왜구의 약탈 때문이에요. 해안가에 10리 이상은 전부 일반 백성들에게 소개령이 떨어질 정도였어요. 왜냐면 워낙 해안가에 우리 양민들 너무나 약탈하고 유적지를 훼손하기 때문에..."

하지만, 반출 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환수는 쉽지 않습니다.

<인터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연구실장) : "우리가 물건을 돌려달라고 그러고 싶어도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나간 유물들이 어떻게 나갔는지 그리고 어떤 상태로 있는지 등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조사를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등 전란의 와중에 일본에 약탈당한 익선관과 고려 불상들.

이 유물의 잇단 귀환은 일본의 문화재 약탈이 일제 강점기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두꺼운 세월의 먼지 속에서 국외를 떠돌다가 수백 년 만에 돌아온 유물들.

이 유물들은 지금 약탈된 문화재의 환수를 위해 나라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한승연기자

출처: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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