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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옹진 섬에 울려 퍼졌던 ‘대한독립만세’....덕적, 울도, 문갑도 등 3.1만세운동 현장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3.07]



옹진 섬에 울려 퍼졌던 ‘대한독립만세’
덕적, 울도, 문갑도 등 3.1만세운동 현장
  

1919년에 전개된 3월 1일 운동은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서 전 국민이 참여한 저항운동이었다. 인천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3.1운동에 참여하여 저항운동을 벌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백암 박은식 선생은 3.1운동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치열한 운동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선생은 불후의 명저『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3.1운동에서 조국 독립의 희망을 보았으며 세계의 다른 피압박 민족에게 크나 큰 자극을 준 운동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경기도내에만 25개 지역에서 303회에 걸쳐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참가 인원은 6만8천100명, 이 중 사망자는 1천409명, 부상자는 2천677명, 체포자는 4천220명에 달하였다. 전국적으로 볼 때 길게는 3개월여 동안 전개되어 인천 지역에서도 많은 민중의 참여하에 전개되었다.


창영초등학교와 인천공립상업학교 동맹휴업에서 시작
인천에서 시작된 3.1운동의 함성은 창영초등학교(당시는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열었다. 이들 학교 학생들은 서울에서 개최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동맹휴학을 벌였다. 이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공립보통학교 교직원들은 학생들의 집단적인 행동을 저지하는 한편  시시각각으로 상황을 경찰서에 보고했지만 학생들은 갖은 탄압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시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덕적도에 있는 기미삼일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인천에서 시작된 3.1 독립운동은 옹진군 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옹진군에서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을 전개한 곳은 덕적도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진1리 136번지에는 덕적도에서 전개된 3·1운동과 관련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김포군 덕적도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지 9년 후인 1919년 3월 1일에 임용우(林容雨,1884∼1919)선생은 고향인 김포 월곶(月串)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에 수배되어 덕적도(德積島)로  들어와 제자인 한․일학교 선생 이재관(李載寬), 차경창(車敬昌)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이재관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려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독립운동의 여파를 미치게 하였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덕적도  면민들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3 ·1 독립만세운동 60주년을 맞이하여 덕적면민 일동이 만세를 불렀던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3·1운동 60주년인 1979년에 세웠다. 기념비에는 덕적도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임용우와 이재관, 차경창 등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독립유공자들이다. 이들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기록되어 있다.


▲덕적도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임용우 선생

덕적도 명덕학교 교사 임용우 선생, 만세운동 주도

옹진군의 3·1독립운동은 주로 덕적도와 인근의 울도, 문갑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임용우이다. 임용우는 3월 22일부터 시작된 김포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포에서 태어나고 수학한 임용우는 덕적도의 명덕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지만, 김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구상되고 있음을 알고 김포 지역의 유지들과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김포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던 임용우는 일제의 감시와 체포를 피해 재직하던 덕적도로 들어온 시점은 늦어도 4월 4~ 5일경이었다. 덕적도에서는 이미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들어온 이재관의 숙부인 이동응이 독립선언서를 숨겨왔고 이재관에게 보여주면서 독립만세운동의 단초를 만들었다.
덕적도의 합일학교 선생으로 있던 이재관은 독립선언서를 보고, 몇몇 동지들과 함께 독립에 대한 격문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진리와 서포리 등 섬내 곳곳에 붙이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말 혹은 4월 초 독립선언문이 덕적도에 전해졌다. 이재관을 비롯한 교사 및 독립에 뜻을 둔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관련된 격문을 써서 섬 곳곳에 뿌렸다. 이 사건 직후, 김포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실행하였던 임용우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덕적도로 들어왔다. 이들은 덕적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계획을 추진하였다. 섬이라는 특성상 김포처럼 군중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장날’같은 계기가 섬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다. 임용우가 제시한 방법은 ‘학교운동회’를 개최하는 것이었다.
임용우의 명덕학교 제자인 이재관과 차경창이 덕적도 각 지역을 돌며 4월 9일 ‘운 동회’ 개최을 알렸다. 운동회 장소는 진1리 해변 운동장이었으며, 당일 섬 유지들과 많은 학생 및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오전 중에 운동회와 관련된 줄다리기와 달리기, 씨름 등이 진행되었고 행사가 끝나자마자 운동회는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운동으로 성격이 변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은 임용우의 독립 연설과 이재관의 격문  낭독 그리고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임용우 선생을 비롯한 덕적도 3.1운동 주도한 독립운동가들의 추모비




이때 만세운동 참가자 수는 명덕학교에서 50여 명, 합일학교 30여 명이었다. 명신학교에서 참여한 학생 수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명덕과 합일학교의 예로 보아 다수의 재학생과 교사가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덕적도 주민 다수가 참석했을 것으로 보여, 적어도 100명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덕적도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재판 기록에는 만세운동 참여자 수가 ‘수십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다른 지역의 예로 보아도 많이 축소된 것이다. 실제로 4월 9일 운동회에 참여하였거나 참여한 인물들과 관련된 인사들은 150명에서 300명 정도로 여겨진다. 


‘학교운동회’ 끝난 뒤 주민, 학생 만세 동참
덕적도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진1리 해변가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운동회가 끝나고 만세운동이 있은 다음에 주민들과 학생들은 각기 자신들의 마을로 돌아가서 운동회에 참여하지 못한 주민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 해변가에서의 만세운동이 끝나고 여기에 참여한 학생 및 주민들은 각자 거주지로 돌아가 다시 독립만세를 불렀다. 진리에서는 뒷산에서 봉화를 피우며 만세를 불렀고 서포리는 국사봉에서, 북리는 주요 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4월 9일 진행된 덕적도의 독립만세운동은 밤 9시 이후에야 각 마을에서 끝났다.
한편, 덕적도에서는 4월 9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그날 밤에 끝났지만, 인근 울도에서는 하루 이틀 쯤 지난 후에 만세운동이 있었다. 울도는 덕적도 아래 있는 작은 섬으로 서해안 해로의 요충이었다. 이곳에는 일본 해군이 운영하는 망루(望樓)가 있었고 관리는 인천경찰서가 담당하였다. 울도에는 학교가 없고 일종의 사숙(私塾)만 있었다. 사숙 교사인 이인응(李仁應)은 울도 학생 2명을 데리고 본가가 있던 덕적도 서포 2리에 다녀오는 길에 덕적도 운동회에 참여했다가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만세운동이 끝난 다음에는  자신이 사는 동네로 가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침을 갖고 울도에 돌아와 만세를 불렀다.




▲ 임용우 선생 불망비




 이인응이 울도에서 만세운동을 실행한 날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울도 만세운동으로 인해 덕적도의 만세운동이 알려지게 되었다. 울도는 인천경찰서 소속이었고, 인천 경비정이 정기적으로 울도에 들러 망루를 관리했다. 이런 이유로 울도 만세운동은 인천경찰서에 알려졌고 결국 주요 참가자들의 체포되는 원인이 됐다.
일본 경찰서에 가장 먼저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임용우였다. 임용우의 정확한 체포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덕적도에서 만세운동이 있던 4월 9일에서 4~5일 지난 다음으로 보인다.  덕적도 헌병 주재소에서 이미 임용우는 일본 경찰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에 의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를 당하고 철사줄에 묶여 있는 등 잔혹하게 보복을 당했다. 이어 임용우는 인천경찰서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더욱 가혹한 구타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임용우, 이재관, 차경창 독립유공자로 공훈록에 기록
임용우가 체포된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임용우와 함께 덕적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수업 중에 조선인 헌병보조관으로 있던 이유문에 의해 잡혀갔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이동응과 장기선, 남준기 등이 체포되어 임용우와 함께 인천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각각 8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재관과 차경창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 11일자로 기각되었고,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9일 기각됨으로써, 1심대로 형량이 확정되었다. 그렇지만 임용우는 덕적도 헌병주재소에서의 구타와 인천경찰서에서의 가혹한 고문으로 이미 회생이 불가능하여 심문 중에도 들 것에 실려 나올 정도였다. 그는 항소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5월 10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덕적도의 3.1운동을 주도한 임용우 선생은 한번 죽어 영원히 사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실증적 사례다. 임용우와 함께 항거에 참여한 이재관과 차경창 역시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그들은 일제 침략자들이 가한 징역형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받아들여, 임용우와 함께 지금까지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글 이용남 ‘I-View’편집위원, 사진 앨범쟁이 제공

원문보기
http://enews.incheon.go.kr/publish/php/articleview.php?idx=11978&section=11&diaryDate=2017-02-28&chapte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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