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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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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해상교통의 요지, 근대의 역사를 품은 강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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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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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tv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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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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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이 발달한 강경, 일제 수탈기지로서의 아픔 조선시대 당시 강경은 원산과 함께 2대 포구로 번성했다. 이를 바탕으로 강경은 평양, 대구에 이어 조선시대 3대 시장으로 자리잡았다. 강경포구는 금강 하류 지역으로서 금강 본류와 접해있을 뿐만 아니라 내륙으로 통하는 논산천, 염천, 강경천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내륙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해상 교통이 원활했던 강경은 자연스럽게 상업 도시로 발전해갔다. 홍수가 나면 피해를 크게 입었던 강경은 1800년대 후반부터 강경천에 제방을 쌓는 호안공사를 시작하며 건축물을 세워나갔다. 1905년 자본금 50만 환으로 한호농공은행을 설립했지만 일제 침략에 의해 1911년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으로 개점해 1913년 현재 위치로 신축 이전했다. 당시 일제는 전북 만경평야와 익산, 그리고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공수해온 쌀을 강경의 방앗간에서 현미로 도정해 군산으로 이동, 큰 배에 쌀을 실어 수탈해 갔다. 일제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는 배수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짠강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수장을 만들었지만, 이는 일본인 전용 시설이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지역민들이 줄을 지었다고 한다. 1931년 1월 조선식산은행은 호서은행과 합병하여 동일은행으로, 1943년 10월 조흥은행 강경지점으로, 광복 후 한일은행 강경지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마지막으로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바뀌면서 명실공히 근대 시기에 번성했던 강경지역의 상권을 대변하는 금융 시설로 남았었다. 한동안 중앙독서실, 개인소유의 젓갈 창고로 쓰이다 시에서 관리하게 됐고, 2007년 등록문화재 제324호로 등록된 후, 2014년도부터 강경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잊지 않아야 하는 강경의 역사를 되짚다 강경의 사라져가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다시금 되살리고자 약 3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1년에 (사)강경역사문화연구원이 발족되었다. 47명의 연구원은 강경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하고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의 자발적 참여로 강경역사관을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나갈 수 있었으며, 지역주민은 물론 타지에서 온 관람객에게 강경의 역사를 알리는 거점이 됐다. 멋스럽게 빛바랜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강경역사관이다. 본 건물은 연면적 188.44㎡이며 지상 1층 규모의 서향 건물이다. 건물 오른쪽에 창고와 살림집을 두고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벽기둥이 네 귀퉁이에 각각 세워져 있고 가운데가 텅 빈 전형적인 은행 구조를 하고 있어 전시관으로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건물에 쓰인 화강암은 최상으로 인정받는 전북 익산의 황등석이 사용됐다. 외관은 전면부와 금고실 부분을 제외하면 대칭을 이루고 있어 안정적이며, 천장 높이가 7.2m로 높아 내부 공간이 환하게 보인다. 6·25 때 폭격으로 지붕이 파괴되어 원형을 살려 복구해놓은 상태이다. 강경역사관에는 이 지역의 삶과 산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도지정문화재(5개)는 물론, 향토유적(4개)과 등록문화재(10개)의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강경역사문화연구원은 2014년 강경 역사문화학교를 개설해 어느덧 3기를 배출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강경의 잊힌 역사를 배우고 근대역사문화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글‧박송규(강경역사관 원장) 사진‧안지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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