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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귀중한 우리 문화 유산]6세기 고구려의 국력을 엿볼 수 있는 수도성 국보유적 제1호 ...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5.01]
6세기 고구려의 국력을 엿볼 수 있는 수도성 - 국보유적 제1호 평양성 고구려는 영양왕 8년(552)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유리한 지형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기 시작해 평원왕 28년(586)에 현재 평양의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북한의 국보유적 제1호인 평양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교차하고 남북으로 평지와 구릉이 알맞게 배치된 지대에 있다. 조선시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라고 했다. 평양성의 을밀대

40여 년에 걸쳐 도성으로 축성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며 동북아시아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고구려는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첫 수도성은 현재 대성산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수도방위 등 여러 측면에서 일부 불합리한 점들이 있어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싼 수도성을 새롭게 건설했다. 그것이 바로 평양성이다.
문헌에는 평양성의 축성 시기와 관련해 552년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586년에 완공됐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여러 개의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돌)이 발견되면서 성 건설의 단계와 규모 등이 알려지게 됐다.
현재까지 발견된 성돌에는 “기축년 5월 21일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12리는 물구 소형 배수백두가 맡아 쌓았다”, “병술년 12월에 한성 하후부 소형 문달이 쌓았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가면서 관여하였다”는 내용 등 성을 쌓은 시기와 규모, 건설감독자의 관직과 이름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내성은 566년부터 569년 사이에 축조되었고, 이와 병행해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성인 북성의 축조도 진행됐다. 외성과 중성은 569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건설되었는데 그 규모는 내성과 북성의 3배 정도였다. 또한 ‘본성은 42년 만에 공사를 끝냈다’는 대목도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가 586년에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여러 해 동안 공사마감정리 사업 등을 계속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평양성의 바깥 성벽은 금수산의 모란봉을 북쪽 끝으로 하고, 서남으로 을밀대, 만수대를 타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치는 목에서 동북으로 꺾이어 대동강을 거슬러 대동문을 지나 다시 모란봉에 이른다. 평양성의 둘레는 약 16km, 성벽의 총 연장길이는 23km, 총면적은 11.85k㎡에 달했다.
내성, 중성, 외성, 북성으로 나뉘다
평양성은 총 4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궁이 있던 내성은 을밀대에서 시작해 현재의 만수대와 남산재를 거쳐 대동문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차지했다.
안산과 창광산, 해방산 지역을 포괄하는 중성은 주로 고구려 국가의 중앙 관청들이 자리 잡고 있던 행정중심지였다. 주민들이 살던 지대였던 외성은 중성의 남쪽 벽을 경계로 하여 지금의 평양 중구역 남부와 평천구역 일대에, 외곽 방어성인 북성은 을밀대에서 북쪽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평양성 북쪽에는 험한 산 능선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모란봉이 솟아있고 동·서·남쪽의 세 면에는 대동강과 보통강으로 자연적인 해자(垓字: 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이루고 있다. 외적이 침입하기에는 불리하고 아군이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셈이다.
현재 남아 있는 대동문은 내성 동문이고, 칠성문은 내성 북문, 보통문은 중성 서문, 전금문은 북성 남문, 현무문은 북성 북문이다. 또 전망이 좋은 7개의 봉우리에는 장대를 두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을밀대와 최승대이다. 고려시대에 출간된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 주변 지역을 포함한 수도의 집 수는 21만 508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6·25전쟁 후 파괴된 성벽과 유적 복구
평양성의 성곽과 역사유적들은 6·25전쟁 시기에 대부분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유일하게 보통문만이 엄청난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아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내성과 북성의 문과 장대는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되었다. 다만 내성과 외성, 중성의 성곽들은 과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북한은 1990년대 초까지 평양성 내성의 동문인 대동문을 국보유적 제1호로, 평양성의 비밀통로인 동암문(東暗門, 고구려, 6세기 중반)을 보존유적(보물급)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그러나 북한은 1994년 문화유물 보호법을 제정한 후 역사유적에 대한 지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함에 따라 대동문 대신 평양성 전체가 국보유적 제1호로 변경됐고, 평양성의 현무문이 보존유적 제1호로 지정됐다.
1980~90년대에 안학궁터, 단군릉, 동명왕릉 등 새로 발굴되거나 개건된 고조선과 고구려 시기 유적들이 재평가되고, 새로 역사유적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력사박물관의 리정남 실장은 2007년 5월 필자와의 만남에서 “1990년대에 단군릉, 동명왕릉, 안학궁터 발굴이 이뤄지면서 기존 국보유적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평가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재조정이 이뤄졌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로 건설된 평양성이 국보유적 제1호로 변경됐다”고 설명했다.
평양성에서 가장 높은 모란봉은 현재 아름다운 경치와 고즈넉한 누각, 현대적인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평양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모했다. 예로부터 모란봉은 ‘천하제일 강산’으로 불리며 조선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승지였다.
최근에는 그동안 접근이 통제됐던 국보유적 제22호 전금문과 영명사 5층 석탑도 공개됐다. 다시 남북교류가 재개돼 평양성 답사가 가능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글+사진‧정창현(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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