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솔사’는 이름에서 그려지는 이미지만큼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조용한 산사와 함께 수줍은 손을 내민다.
광양에서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어 반나절 산행코스는 물론 교외로 나가는 여행의 맛까지 느낄 수 있어 좋다. 입장료가 없어 부담이 적고 적멸보궁 사찰과 솔밭 길을 산행할 수 있는 편안함에 정겨운 시간을 가질 수가 있다.
다솔사란 이름만으로 정이 가는 곳으로 입구에서부터 펼쳐지는 아름드리 소나무 길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곧게 뻗은 소나무 끝을 따라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하늘이 내려와 천년의 전설처럼 그 바람 속에서 세월을 느끼게 한다.
중마시청 앞을 출발해 옥곡 나들목을 지나 남해고속도로에 진입, 섬진강 휴게소와 섬진강교를 지나 경남으로 진입해 달리다 보면 30킬로미터 지나 곤양 나들목이 나온다. 곤양 나들목에서 다솔사까지의 거리는 3.5킬로미터다.
곤양나들목을 나와 북천ㆍ곤양방면으로 우회전해 곤양면 면소재지를 지나다보면 비봉내팜스데이 대밭체험장을 지나고 비로소 논과 밭에 푸르름이 가득한 시골풍경이 펼쳐진다.
다솔사 입구에서 좌회전으로 진입, 너와집 동다솔을 지나 낮은 산길을 1.5킬로미터 정도 오르면 다솔사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옥곡~곤양 간 고속도로 이용요금은 1천700원이며 중마시청에서 다솔사 주차장까지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천년고찰 다솔사의 유래
다솔사(多率寺)는 적멸보궁의 누워있는 부처님(와불), 극락전 벽화, 석굴암을 닮은 보안암 석굴 등이 유명하며 후불탱화 속에 108개의 사리가 발견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봉황이 우는 터에 건립된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에 있는 다솔사는 봉황이 노래한다는 봉명산이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차나무 군락지도 보이는 등 명당으로 불린다.
다솔사는 근대기에 생겨난 적멸보궁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로 창조적 가치가 높다.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신라 지증왕 때인 503년 영악대사가 영악사로 창건했다고 전해오기도 하고,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주민 대부분은 연기조사 창건설을 믿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8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뒤 자장율사(신라 선덕왕 5년)가 다솔사로 중건했다가 의상대사(신라 문무왕 16년)가 중창하면서 영봉사라고 이름 짓고,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다섯 번째 중건했으며 1914년 12월,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10여 차례나 중창됐다.
삼족오, 꿩, 까치 등 새가 등장하는 비조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군왕을 상징하는 봉황을 이름으로 하는 산에 자리 잡은 사찰이 흥한다는 일설 때문인지 이 절에서 무슨 일을 도모하면 반드시 일이 성취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왜군을 크게 무찌른 승병기지로 삼은 성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절 입구에 늘어선 굵은 소나무는 전장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다솔사는 지금은 차(茶)로 유명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불제자들의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왜구의 침략이 잦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에게 위안이 되는 사찰 기능만이 아니라 군사들이 주둔하며 말을 조련시키고 승병들이 무술을 익히던 훈련장으로도 이용됐는데 그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적멸보궁의 공통된 특징은 진신사리를 곧 부처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찰과는 달리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이 없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의 탑, 계단 등은 다른 사찰의 불상을 대신하는 것으로 다른 사찰의 탑보다 종교적, 미술적 가치가 높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
솔향기로 가득한 한적한 소나무 숲길을 오르다보면 골짜기 시냇물 소리에 한 번 마음을 적시고 자연 숲으로 잘 정돈된 태고의 모습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너른 주차장을 지나 절 입구에 다다르면 본당까지 자연석으로 놓아진 108계단이 발걸음마다 두 손을 내밀어 맞는 듯하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엔 정갈한 약수터가 있으며 오른쪽엔 우담바라가 폈던 곳으로 유명한 대양루가 자리하고 있다. 대양루는 현존하는 다솔사 경내에서 창건 이후 여러 전란을 겪으면서도 화재를 면한 가장 오래된 유형문화재 89호다.
스님들의 집회장소로 또는 한국전쟁당시에는 교실로도 쓰여 졌던 곳으로 지금은 도자기, 그림, 사진 전시 등 문화생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립 운동가들의 은거지이기도 했던 곳으로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 흔적을 찾기 위해 문학인들의 답사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김동리 선생께서 청년기를 보내고 결혼도 한 곳이다.
대웅전 안의 삼존불을 개금불사하기 위한 과정에서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사리 사진을 발견하고 난 뒤에 대웅전 현판을 내리고 적멸보궁 현판을 올렸다고 전한다.
다솔사 적멸보궁의 현판을 쓴 사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성파 하동주 선생의 수제자로 곤양에서 1999년 94세로 돌아가신 도연(陶然), 김정(金正)선생이다.
다솔사는 사천왕, 일주문이 없어 편안한 절집이란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고즈넉한 풍경 그대로다. 깊숙이 숨겨놓은 세월이 자연의 이름으로 길이 되어 열린 곳, 적멸보궁 가는 길엔 풀벌레 소리마저 나를 비우라 한다.
가지런히 피어있는 수련 절구 연못엔 하늘도 들어와 쉬게 해 준다. 적멸보궁 옆엔 자장율사가 지은 응진전과 극락전이 있으며 100년이 넘었다는 비자나무 고사목도 옛 풍경을 더해준다.
4월 초파일이면 마음을 비우려는 사람들과 사찰음식을 맛보며 채우려는 사람들의 물결로 북적거리는 풍경과 유난히 화려한 연등 행렬도 볼 만하다.
민족정신 일깨운 다솔사의 안심료(安心寮)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 인연이 깊은 절로 한용운 선생과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의 안심료에 기거했다고 한다.
한용운 선생은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사찰 내 안심료는 만해가 머물면서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문영빈, 오제봉, 설창수, 강달수, 이기주 선생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선언문 초판을 집필한 곳이다.
한용운 선생의 회갑 기념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심었다는 황금편백은 안심료 앞 마당에 15그루 중 7그루만 남아 아름드리가 되어 황금빛으로 곧고 푸르게 빛나고 있다.
또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안심료에서의 생활을 통해 등신불이란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를 찾은 것은 1937년 봄으로 다솔사 주지 효당 최범술 선생이 문맹퇴치를 위해 절 아래 마을에 세운 학당의 야학 교사로 합류했다.
5년 여 다솔사에 거주하며 마을 어린이와 여성, 심지어 머슴에게까지 우리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그 후 일제탄압이 힘들어 서울로 올라간 선생은 사상계에 등신불을 싣는다. 다솔사 주변 이야기를 작품 속에 많이 담았던 김동리 선생의 제자들도 근처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남기고 가는 발자국, 가지고 가는 추억
다솔사 주변에는 삼나무, 비자나무,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러나 소나무가 많아서 다솔사가 아닌, 많을 다(多), 거느릴 솔(率)자를 쓰는데 ‘많은 불심과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뜻이다. 주산인 봉명산의 모습이 장군이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기에 많은 인재를 거느린다는 의미다.
다솔사에 들어가는 초입의 언덕길 소나무 숲 사이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는 바윗돌이 있다. 조선시대 고종 임금 때 경상감사가 다솔사라는 명당에 선영을 안장하려하자 스님이 주민 탄원서를 임금에게 올려 분묘를 안치하지 말라는 어명을 받아 저지했던 징표다.
우리나라에 있는 봉표나 금표 23개 중 다솔사의 고종임금이 내린 봉표는 다솔사는 누구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좋은 명당, 길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사한 글씨라서 더 유명하다.
특히 다솔사는 군립공원으로 주민들의 자연사랑 애착심으로 상권을 들이지 않아 상술로 얼룩진 사찰 앞 풍경이 없어 소박함이 더 정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책길에 쓰여 있는 남기고 가는 발자국, 가지고 가는 추억이란 정겨운 푯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청학대, 서봉암, 보안암을 찾아가는 산행
다솔사 주차장에 도착하기 전 왼편에는 다솔사의 옛길이 있다. 청학대 장군바위 전설에 따르면 봉암산 정상에 있는 봉바위 정기는 서봉사에는 고명한 학승이 많이 배출되고 다솔사에는 장군바위 정기 때문에 무승이 많이 나와서 두 절 사이에는 자주 마찰이 생겼다 한다.
그때 성질 급한 무승들이 몰려와 칼로 봉바위를 치니 두 동강이 나며 봉은 하늘로 날아갔다고 하는데 반으로 갈라진 바위는 지금도 그대로 정상에 남아 있다.
변을 당한 서봉사 학승들이 다솔사로 몰려가서 장군바위 목을 붓대로 쳐서 부러뜨렸다는 그 장군바위는 다솔사 입구 길 섶에 목이 부러진 채로 전설을 입증하는 듯 지금도 푸른 이끼를 입고 묵묵히 서 있다.
청학대 입구 왼쪽은 최치원 선생이 시를 쓰고 머물다 간 바위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며 주차장 산 중턱에 있는 서봉암은 백년화보살이 지은 암자로 경치가 수려하여 수도하는 학승과 공부하는 학생이 항상 끊이지 않으며 휴일 등산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다.
다솔사 답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산행 코스로는 보안암과 서봉암 가는 길을 꼽는다.
다솔사로부터 2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보안암은 자연석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분묘형 석굴로, 보안암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풍광이 뛰어나고 길도 험하지 않아 가족과 연인들이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선승들의 수행을 위한 곳이었다고 전해지며 석불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굴은 규모가 작고 조성 수법도 거칠고 투박하나 내부 불상의 배치 등은 석굴암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고려 말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전해진 보안암 석굴은 경주의 석굴암처럼 먼저 불상을 안치한 뒤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은 물론 석굴 안의 커다란 돌부처의 미소를 머금은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돌계단과 돌 벽에 낀 이끼 옷에서도 사람들이 심어놓은 이야기가 들리는 듯 태고의 시간 위에 멈춰보는 행복도 맛볼 수 있다.
보안암 가는 길은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 숲에 잘 정돈된 흙길을 따라 가다보면 솔잎 향기가 코를 찌른다. 맨발로 산책하고 싶을 정도로 등산의 개념보다는 산책이 어울릴 듯한 산길이 매력이기도 하다.
나지막한 산길을 따라 등산, 삼림욕, 약수도 즐길 수 있으며 곳곳에 쉼터와 생활체육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보안암을 지나 잠깐 돌아가는 대숲 길 끝엔 ‘시루떡 바위’란 이름의 큰 바위가 지친 마음까지 쉬게 해 준다.
나무마다 붙여진 이름표를 보며 이름을 불러줘서 좋고 내려오는 길 직선 코스에는 나무계단 옆에 만들어진 야생화 꽃밭이 시름까지 반겨준다. 학명, 분포지역, 특징, 용도, 번식까지 자세히 적어 놓은 자연 꽃밭은 비비추, 하늘매발톱, 옥잠화, 구절초, 원추리, 벌개미취, 패랭이 꽃 등의 야생화 꽃들이 다솔사를 오래 기억하게 하는 작은 모습이기도 하다.
장맛비에 산길 물고를 터준 산사람들의 손길이 있어 더 아름다운 곳, 등산 후 옷과 신발의 먼지를 털어내는 기구 설치 등 작은 배려가 고맙기만 하다.
반면 정상 오름에는 45도 경사로 땀을 흠뻑 낼 수 있는 등산코스로 0.5킬로미터 거리도 있다. 튼실한 적송 소나무로 가득한 봉명산 해발 408m 정상에는 나무 정자가 있으며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한려수도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와 남해 앞바다가 융단처럼 펼쳐진다. 여기서는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며 토해내는 뱃고동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차 문화의 산실
다솔사 주변은 야생 차밭으로 가득 차 있다.
2~300년은 족히 됐을 법한 야생 차나무 밭이 다솔사를 감싸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자생하는 차밭도 많다. 여기에 효당 선생이 다솔사 주지로 있으면서 주변에 차나무를 직접 심고 돌보며 차를 마셨다. 효당 선생이 다솔사 주변 1㏊가량에 재배한 차나무에서 반야차를 만들어 보급한 차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1973년 초판 발행된 한국의 다도는 현대 차 공부의 표본이 되고 있으며 1977년 다솔사에서는 한국 최초의 차인 모임도 발족됐다. 다솔사를 찾으면 말 그대로 우리 차 문화를 한 몸에 느낄 수 있다. 다솔사 주지 혜운 스님은 "다솔사는 우리 민족이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의 산실이었다."며 "앞으로 한용운 선생과 김동리 선생이 걷던 오솔길을 발굴하는 등 사찰환경을 정비하고 정신문화의 산실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겠다"는 꿈을 말했다.
인근 둘러볼 곳으로
다솔사에서 원전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8㎞가량을 가면 세종과 단종의 태(胎)가 안치된 세종태실지(지방기념물 제30호)와 단종태실지(지방기념물 제31호)가 나온다.
태조는 왕비가 세종대왕을 낳자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전국에 태를 안치할 좋은 곳을 찾다가 지금의 사천시 곤명면 은사마을에 어태를 안치했고, 세종대왕은 애지중지했던 단종이 태어나자 자신의 태실 곁에 단종의 태를 안치하도록 했다.
다솔사에서 사천읍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 6㎞가량을 가면 곤양면 흥사마을의 매향비(보물 제614호)가 있다.
자신의 소원을 적은 향나무를 강이나 바닷물에 잠길 정도의 위치에 묻고는 그 위에 내력을 새긴 돌을 올려놓은 것이 매향비다. 왜구의 창궐로 나라가 어수선하던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주민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이곳은 모두 4100명이 계를 만들어 조성했는데, 당시 이 일대의 주민은 2000여 명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솔사에서 남해고속도로 곤양IC를 통과해 바다로 향하는 남쪽으로 8㎞가량을 가면 토끼의 간을 꺼내기 위해 용궁이 있는 바다 속으로 유인하는 거북이의 이야기, 그림 별주부전의 실제 무대로 알려진 비토섬에 닿는다. 이곳에는 지금도 토끼 섬, 거북이 섬, 월등도 등의 이름을 갖고 있는 섬들이 있다. 일몰 때 이곳의 경치는 한 폭의 수채화다.
다솔사에서 원전마을을 거쳐 국도 2호선을 타고 진주방향으로 5㎞가량을 가면 우리나라 평지 녹차 밭으로는 가장 면적이 넓다는 다자연녹차원이 나온다.
47㏊의 넓은 녹차 밭은 평지를 바둑판처럼 규격화해 자동차나 채엽기 등 기계 장비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 경쟁력을 높였다. 최근 만들어진 이곳의 녹차 체험장에는 상시 운영하는 다도교실과 무료 시음장은 물론 천연염색, 천연비누 만들기, 도자기 만들기, 연 만들기, 나비 및 곤충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청정무구로 긴꼬리투구 새우 관찰, 토마토 따기, 국화 따기, 썰매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5.15킬로미터의 물고뱅이마을 둘레길도 인기가 있다.
다솔사 입구 주차장 건너에는 특산품과 예술공예품 상설 전시장이 있으며 산채비빔밥, 국수, 수제비, 막걸리, 파전 등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음식점이 있다. 다솔사를 내려오는 길에 너와집 지붕의 동다솔의 들깨가루를 넣은 사찰국수도 별미다.
마음이 쉬고 싶어 할 때 조용히 나를 위해 떠나고 나를 만나고 올 수 있는 곳이 산사일 것이다. 내 목소리가 작아지고 자연의 소리로 내 안을 채울 수 있는 행복, 하루쯤 적멸보궁 다솔사와 봉명산 산행으로 당당히 출가해 봄은 어떨까.
나를 버리고 다시 나를 찾아 돌아오는 길, 돌탑 사이에 꽂혀 있던 솟대가 기둥만 남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비바람에 날아갔을까 어쩜 벌써 소원이 하늘에 닿은 걸까...
- CNB뉴스 이희경 기자 www.cnb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