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였습니다.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봉황산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녀는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습니다. 한번은 근처에 숨어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습니다. 무량수전 뒤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이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부석사 관련한 설화인데요,스님과 여인의 사랑 이야기만으로 뭔가 비밀스러운 이곳! 오늘 도깨비가 안내해드릴 곳은 먼저 영주의 부석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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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의 연봉들이 눈앞의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화엄종찰 부석사에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화엄종을 영원히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 땅 속에 몸을 묻은 거대한 석룡이 무량수전 뜰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부석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의상을 깊이 흠모했던 중국여인 선묘가 바다에 몸을 던진 후 용이 되었다. 그 이후 의상은 선묘의 도움으로 부석사를 창건하였고 중생들에게 화엄사상을 전파해 나갔다고 한다. <부석사 방문정보>. 위치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연락처 : 054)633-3464 주변볼거리 : 읍내리벽화고분, 금성대군 신단, 초암사, 성혈사, 선비촌, 선비문화수련원, 소수서원, 경륜훈련원, 청소년수련관, 소백산풍기온천. 관련 홈페이지 : http://www.pusoksa.org
특히 이곳에 있는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입니다.
부석사에는 기묘한 비밀들로 가득합니다. 그 중 하나가 부석사에 새겨진 한 글자에 관한 것인데요. 통일신라를 이룬 문무왕은 분열된 삼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세계관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의상대사는 부석사를 세우고 가람배치 속에 새로운 세계관을 상징하는 글자 하나를 숨겨 놓습니다. 그 글자는 바로 '빛날 화'! 화엄종을 나타내는 글자이자 빛나는 극락을 상징합니다. 통일 신라의 아픔을 화엄 9품 정토 사상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의 상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져 있는 듯 하는데요. 동영상을 보면서 부석사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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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를 이룬 문무왕은 분열된 삼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세계관을 필 요로 했다. 이를 위해 의상대사는 부석사를 세우고 가람배치 속에 새로운 세계관을 상징하는 글자 하나를 숨겨 놓았다. 화엄종을 나타내는 글자이자 빛나는 극락을 상징한 글자인 '빛날 화'. 가람과 공간 배치 하나하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세워진 부석사는 통일 신라의 아픔을 화엄 9품 정토 사상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의상의 간절한 염원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부석사 있는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입니다. 고려 헌종 7년인 1016년에 중창됐습니다. 무심한 눈으로 보면 화려한 기교나 장식 없이 조촐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돌계단 하나, 기둥 하나까지도 저마다의 완결성으로 빛이 납니다. 지붕 추녀의 곡선 하나, 무심한 기둥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무량수전 여기저기 숨겨진 곡선의 비밀을 동영상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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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의 절정은 국보 18호로 지정된 무량수전이다. 고려 헌종 7년인 1016년에 중창된 무량수전은 무심한 눈으로 보면 화려한 기교나 장식이 없는 조촐한 목조건축물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돌계단 하나, 기둥 하나까지도 저마다의 완결성으로 빛난다. 사무치는 고마움과 아름다움으로 다시 보게 되는 웅숭깊은 공간. 지붕 추녀의 곡선 하나, 무심한 기둥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석사의 비밀스러움을 찾아보셨다면, 이제 옛 조상들의 ‘학구열’을 엿볼 수 있는 서원으로 이동해볼까요? 영주시 순흥면에 자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입니다.
원래 소수서원의 이름은 백운동이었습니다. 서원을 둘러싼 골짜기에 항상 흰구름이 흐른다하여 1543년, 주세붕이 명한 이름이지요. 백운동 서원이 큰 변화를 맞게 된 것은, 당시 풍기군수였던 이황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으라’며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명종으로부터 받아 지었습니다. 이후 국가공인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됐고, 조선후기 서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학문의 디딤돌이 되었답니다.정갈하게 지어진 조선시대 여기저기 ‘교실’들을 거닐다 보면 학문에 정진했던 옛 선현들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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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기슭 경북 영주시에 위치한 소수서원. 조선후기 전국 각지에 세워져 숱한 젊은이들의 배움터가 되었던 서원. 그 위대한 시작이 바로 이곳 소수서원이었다. 소수서원의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강학당’이다 . 이곳은 학생들이 모여 성리학의 경전을 읽거나,강의를 듣던 장소인, 강당이었다. 강학당 바로 옆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강학당보다 먼저 세워진 건물. 그래서 서원은 교육기관인 동시에 종교기관이라 평가된다. 이 서원은 1543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세웠다. 그때 이 일대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기근이 번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세붕은 서원을 세웠다.서원을 세우는 것이 기근을 구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교화.주세붕은 무엇을 교화시키려 한 것일까. 그 해답은 이 사당에서 찾을 수 있다. 사당에 모셔진 위패는 이곳이 문성공을 기리는 곳 임을 알려준다.문성공.이것은 고려의 성리학자 안향의 시호다. ‘고려의 주자’라고도 불리는 안향은, 송나라의 주자학을 처음으로 고려에 전파한 학자다.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탐구하는 그의 학문은 이색과 정몽주로 이어지고, 이황과 이이에서 완성되어간다. 주세붕은 바로 이 성리학의 보급을 위해 소수서원을 세운 것이다. 소수서원의 서당 뒤쪽에 세워진 영정각. 영정각은 유교성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중국 송나라때 유교철학을 집대성해 주자학을 탄생시킨 주자로부터 조선 성리학의 시조 문성공 안향.송시열과 함께 17세기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미수 허목의 영정도 보인다. 위대한 학자들에게 예를 표하고 그들을 기리는 것것이 학문의 시작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의 동쪽엔, 북에서 남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죽계천이 있다. 학생들이 학업에 힘쓰는 한편,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사랑받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 죽계천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일명 ‘경자(짜)바위’. 바위에 새겨진 ‘경’자는 주세붕이 서원을 창건하며 새겨놓은 것이라 전해진다.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첫 번째 덕목.그것이 바로 ‘경’이었다. 소수서원의 여러 학생들은 이곳 죽계천에 나와 사색을 즐기고 토론도 하며 학문을 연마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자바위에는 또 하나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백운동’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이란 글씨는 서원안에 있는 건물, 강학당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이 곳에 왜 백운동이란 글씨가 보이는 것일까. 백운동.이것은 소수서원의 첫이름이었다. 1543년, 주세붕이 지은 이름 백운동서원. 서원을 둘러싼 골짜기에 항상 흰구름이 흐른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백운동 서원이 큰 변화를 맞게된 것은, 당시 풍기군수였던 이황의 노력덕분이었다. 이황은 지방교육을 책임지던 관학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무너진 관학을 대신할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백 운동서원을 주목하고,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결국 명종은 이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으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 더욱이 명종은 친필 글씨까지 내림으로써 이후 국가공인 교육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시대 서원의 본격적인 출현을 알린, 소수서원.국가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조선후기 서원을 중심으로만 새로운 학문의 디딤돌이 되었다.
사실 서원을 찬찬히 훑어보면 그 규모와 장식 면에서 크거나 화려하지 않습니다. 소박하고 단정할 뿐입니다. 이는 초기 성리학자들이 지녔던 근검절약의 정신과 실용주의 정신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유교성현을 제사지내는 종교공간인 동시에 유교철학을 담은 경전을 공부하던 교육의 공간, 서원의 건축학적인 특징을 아래 참고 동영상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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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서원의 시대를 알린 첫 신호탄, 소수서원. 유학의 근본정신과 유학자로서의 삶을 가르치던 조선후기 전문교육기관이었다.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이 강조한 것은 두 가지.제사와 교육이었다. 1542년 서원 건 립에 나선 주세붕이 가장 먼저 세운 건물은 제사기능을 수행할 사당이다. 이 사당은 문성공, 즉 고려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소수서원에서 가르칠 학문이 성리학임을 분명하게 규정지은 것이다. 학생들이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던 교실. 강학당.이곳에선 글을 소리내어 읽는 강학의 방법으로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유교경전을 공부하였다. 명종의 친필 편액이 내려지면서 소수서원의 인기는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입학자격은 까다로웠다. 향시,초시에 합격해야 하고,무엇보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 마치 지방의 사립대학과 같은 성격이었던 것이다. 입학정원은 원래 10명이었으나, 사액서원이 된 이후부턴 많게는 30명도 뽑았다. 이로 인해 소수서원을 거쳐간 학생수는 총 4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소수서원이 품은 학문 탐구의 열정은 건물 곳곳에서 발견된다. 매일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교실, 강학당은,사당옆 소수서원의 중앙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기숙사 지락재와 학구재가 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건물은 마루칸 앞뒤를 틔워 놓았다. 숙소는 따로 쓰지만 학생들은 자유롭게 오고가며 교류할 수 있었다.소수서원은 교사들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직방재는 원장의 거처.일신재는 일반 선생님의 숙소이자 사무실이었다. 소수서원의 건물들에는 모두 각각의 이름이 있다.이 이름은 건물의 사용 용도를 알려주는 동시에 그 건물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가져야할 학문에 대한 태도를 일러준다.매일 건물을 드나들며 자신의 본분과 할 일을 되새기라는 뜻이다. 학문의 첫 단계인 독서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이름 지락재. 이곳은 초급과정의 학생들이 묶었다. 학구재는, 학년이 높은 고급과정의 학생들이 묶었는데 마치 구도자처럼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라는 뜻이다. 서원의 선생님들이 거처하던 공간은 유학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일신재. 날마다 새롭게 새로운 지식을 얻으라는 학문정진의 뜻을 담고있고. 직방재는, 늘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하라는 유학자로서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서원의 입구에 길게 늘어서있는 송림 숲도 어떤 학자가 되어야 할까 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 인생의 어려움과 시절의 흐름속에서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지조를 잃지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참선비가 되라는 뜻으로 소나무를 심은 것이다. 소수서원의 건물배치는 이후 다른 서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도산서원의 경우, 강학당이 서원의 맨 앞,첫번째 건물로 세워졌다. 이런 경향은 조선시대 서원들의 공통된 특징이 된다. 서애 류성룡이 세운 병산서원의 건물 배치도를 보면, 이런 현상을 잘 엿볼 수 있다. 학습공간인 강학당은 앞에 있고, 제사공간인 사당은 뒤쪽에 배치했다.
위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연락처
054)633-346
주별 볼거리
읍내리벽화고분, 금성대군 신단, 선비촌, 소수서원
관련 홈페이지
http://www.pusoksa.org
가는 길
자가 이용 : 중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풍기IC->부석사
대중교통이용 : 영주시내버스터미널에서 부석사 행 버스 40분정도 소요 기차 이용 시 영주역이나 풍기역 도착 후 부석사행 버스 이용